진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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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여신(成汝信) : 자는 공실(公實)이요, 호는 부사(浮査)며, 우윤(右尹) 성두년(成斗年)의 아들이니 가정(嘉靖) 병오년(명종 1년, 1546)에 나서 만력(萬曆) 기유년(광해군 1년, 1609)에 생원과 진사의 두 시험에 합격했다. 일찍이 남명(南冥)과 구암(龜巖)의 두 문하에서 유학하여 경의(敬義)의 지결(旨訣)을 얻어듣고 종신토록 마음에 깊이 새겼다. 서책은 읽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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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일반성면에 전해오는 진양정씨 가문의 충신에 관한 설화. 1980년 8월 7일 정상박, 성재옥, 김현수가 당시 경상남도 진양군 일반성면 창촌리 신촌마을에서 채록하였으며,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8-4에 수록되었다. 제보자는 손영권(남, 56세)이다. 사봉면(寺奉面)에 진양정씨(晋陽鄭氏) 가문의 사당이 있는데, 사당 주인공 정씨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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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전승되는 비봉산(飛鳳山)과 대나무 열매에 얽힌 설화. 신라 말과 고려 초 쯤 풍수사상이 우리나라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영향으로 각 지역마다 풍수의 관점에서 복을 취하려는 설화가 많이 생겼다. 대나무열매 설화도 그런 유형 중 하나이다. 진주시에서 1983년에 발행한 『내 고장의 전설』에 처음 수록되었고, 그 후 진주문화원에서 1994년에 발행한 『진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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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유학(幼學) 강검(姜儉)의 아내이다. 『진양지』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정씨(鄭氏)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3년에 왜적들에게 항거하여 정절을 지키려다가 죽었다고 한다. 진주 가좌촌에 살았다고 한다. 중종 때에 열행이 알려져 정려되었다. 진주는 예향(禮鄕)으로써 예로부터 선비가 많기로 이름난 고장으로 많은 선비들의 덕행과 절행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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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용휴(用休). 좌찬성을 지낸 강희맹(姜希孟)의 아들이다. 1450년(세종 32)에 태어나 1479년(성종 10)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재감정, 좌통례를 거쳐 1485년 상주목사가 되었다. 이어서 판결사·부제학·도승지를 거쳐 1497(연산군 3)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김일손(金馹孫) 등을 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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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사노비로 강대익(姜大益)의 첩이다. 15살 때부터 강대익을 섬겼는데,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함락될 때 강대익이 전사하자, 몸소 그 유해를 거두어 묻고 정절을 지켰다고 한다. 진주 백곡리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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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밀양부사를 지낸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의 아들이다. 진주 진성면 지역에서 살았다. 품성이 효성스러웠고, 제사를 받들 때는 정성으로써 하였으며, 어버이를 섬길 때는 예로써 하였다. 가정을 이루어 분가한 곳이 3리쯤에 있었는데도 부모께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 올리는 일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비록 큰바람이나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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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자장(子章). 아버지는 지창녕현사(知昌寧縣事) 강우덕(姜友德)이며, 어머니는 지보주사(知甫州事) 이혜(李惠)의 딸 재령이씨이다. 1410년(태종 10) 태어나 1429년(세종 1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벼슬을 두루 거치고 1448년 지승정원사, 1452년(문종 2)에 도승지를 지냈다. 1453년(단종 1)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계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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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강몽정(姜夢禎)의 딸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강씨(姜氏)는 임진왜란 다음해인 1593년에 부모를 따라 산 속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나 부모와 형제가 함께 왜적에게 무참히 죽임을 당하자 불 속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불에 타죽어 절개를 지켰다고 한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7세였으며 진주 사죽리(沙竹里)에 살았다. 정려(旌閭)는 받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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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장군. 본관은 진주(晋州). 목종(穆宗)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지기(志氣)가 있고 강하고 과감하여 주로 전공을 통하여 입신하였다. 1021년에 생을 마쳤다. 1012년(현종 3) 5월에 안찰사(按察使)로서 영일(迎日)·청하(淸河) 등지에 쳐들어온 동여진(東女眞)을 도부서(都部署)의 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조자기(曺子奇)와 함께 격퇴하였다. 1016년 내사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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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자명(子明), 호는 완역재(玩易齋). 정당문학 강회백(姜淮伯)의 아들이며 강희안(姜希顔)과 강희맹(姜希孟)의 아버지이다. 1395년(태조 4) 태어나 태종 초에 음보(蔭補)로 계성전직(啓聖殿直)이 되었다. 1416년(태종 16) 공조좌랑으로 있을 때, 천추사(千秋使)가 중국에 가지고 간 무역품 가운데 공조에서 납품한 은이 가짜로 밝혀져 파직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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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부. 강세진(姜世軫)의 아내이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때에 왜군에게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맞서 싸우다 죽었다. 조정에 그 일이 알려져서 마을에 정문(旌門)을 내려주었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그 행적이 기록되었다.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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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아버지는 강순(姜淳)이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에 산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적이 발견하고는 욕보이려고 하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항거하다가 결국 피살당하였다. 선조 대에 조정에 알려져서 마을에 정문(旌門)을 내려주었다. 진주 금산리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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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대함(大函). 아버지는 선무랑(宣務郞)[조선시대 종6품의 품계] 강오수(姜鰲壽)이고, 어머니는 진양정씨(晋陽鄭氏)로 생원(生員) 정이량(鄭以良)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했으며 자라서는 기량이 뛰어났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마을 사람들이 애석하게 생각했다. 1522년[중종 17]에 어풍정에서 태어나 만년에 설매마을로 이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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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효자. 강안명(姜安命)은 천성이 효성스러워 아버지가 매양 이웃 노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니 아내와 상의하여 힘껏 준비하여 이웃들을 모셔와 즐겁게 노시도록 하였다. 때문에 살림이 날로 어려워져갔으나 아버지에게 절대 어려운 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아버지상을 당하여 그 슬퍼함이 자심하였고, 장사를 지내는데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지성으로 해드려 이웃사람들의 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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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군보(君保). 아버지는 지평(持平: 정5품 문신)을 지낸 강전(姜詮)이고, 할아버지는 강석정(姜碩貞)이다. 효성스럽고 형제 간에 우애가 있었다. 형인 진사(進士) 강여평(姜汝平)이 중한 병이 들자 친히 약을 달이고 백방으로 병구완하여 병이 낫게 하였다. 형이 죽자 1년 동안 묘를 지키며 시묘살이를 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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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사 강여평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남편인 강여평이 중병이 들어 죽은 후에 3년 동안 죽만 마시고, 평생 소복을 입었다고 한다. 진주 평거리(平居里)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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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주 소촌역의 향리였던 강용(姜龍)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에는 ‘제조이[諸召史]’로 기록되어 있는데, 제조이는 ‘제씨 성을 가진 여성’을 뜻하는 말이다. 조이[召史]는 양반이 아닌 평민 출신의 과부를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남편이 죽자 장사에 예를 극진히 하였고, 옷을 모두 고쳐 상복으로 만들어 입었으며, 아침저녁으로 제물을 올리고 3년 동안 고기를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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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박사 강계용(姜啓庸)의 아들로, 감찰어사를 지낸 강사첨(姜師瞻)의 아버지이며, 문하시중을 지낸 강창귀(姜昌貴)의 할아버지이다. 『진양지(晋陽誌)』에 의하면, 아버지 강계용과 함께 유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일찍이 아버지 강계용이 서장관으로 일본에 갈 때 따라갔다 왔으며, 뒤에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 또 서장관이 되어 다녀와서는 자손에게 경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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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따르면 문과에 장원하여 두 번이나 승지가 되고 벼슬이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아우 강자순(姜子順)은 옹주에게 장가들어 반성위(班城尉)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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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사인(士人) 강민효(姜敏孝)의 아들이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실려 있다. 아버지가 중병이 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바치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진주 수곡에 살았으며,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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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예하리에 있는 군영 터. 진주는 통일신라 때 강주(康州)로 불리기 시작하여 수차례 변동을 거치면서 고려 초까지 강주로 불리었고, 이때 지리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군진을 두었다. 『진양지』 고적편에 “강주지(康州池) 위에 옛 군영의 터가 있으니, 세상에 전해 오기를 고려 때 절도사가 이곳에 와서 진을 쳤다.”라고 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예하리 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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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부. 부장(部將) 강추국(姜秋國)의 딸이다. 효행이 뛰어나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바쳐 병이 낫게 하였다고 한다. 진주 금산리(琴山里)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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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형지(詗之). 아버지는 승지와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강자평(姜子平)이다. 1490년(성종 2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그 해에 정언으로 등용되고 이듬해 지평이 되었다. 1495년(연산군 1) 장령이 되고 그 뒤 승진을 계속하여 1504년에는 대사간에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일어난 갑자사화 때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위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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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백부(伯父), 호는 통정(通亭). 할아버지는 중대광(重大匡) 강군보(姜君寶)이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강시(姜蓍)의 아들이다. 강종덕(姜宗德), 강우덕(姜友德), 강석덕(姜碩德), 강순덕(姜順德)을 아들로 두었다.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좨주[成均祭酒]가 되었으며, 밀직사의 제학·부사·첨서사사(簽書司事)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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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국오(菊塢)·만송강(萬松岡). 지돈녕부사 강석덕(姜碩德)의 아들이며, 조선 전기 문신 강희안(姜希顔)의 동생이다. 1424년(세종 6) 태어나 1447년(세종 29)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종부시주부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1450년 예조좌랑에 이어 돈령부판관을 역임하였고, 1453년(단종 1) 예조정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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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우경(愚景)·경덕(景德), 호는 인재(仁齋). 지돈녕부사 강석덕(姜碩德)의 아들이고 좌찬성을 지낸 강희맹(姜希孟)의 형이다. 1417년(태종 17)에 태어나 1441년(세종 23)에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가 되었다. 1443년(세종 25)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훈민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으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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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효자 김걸의 동생이다. 내노비로서 진주 명석리에 살았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항상 옆에 있었고 조금도 떠나지 않았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형이 이미 죽은 상황에서 병이 중한 어머니가 자신이 출타한 사이 돌아가시게 되면 종신토록 한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잠시도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제사를 올리는데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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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의 인공호수인 진양호가 조성되기 이전의 광활한 평지. 경상남도 진주시 판문동과 귀곡동 일대에 조성된 진양호 지역의 옛 이름이며, 경호강과 덕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해당한다. 진양호가 조성되기 이전에는 광활한 평지였으며, 동학농민운동과도 관련된 역사의 현장으로 지금은 진양호 내에 수몰되어 있다. 진양호를 지칭하는 광탄진은 순우리말로 ‘너우니’라고 불리기도 한다. ‘너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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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진양문화원에서 『진양지』·『진양속지』·『진양속지 증보』 등을 국역한 책. 모두 10권으로, 『진양지』4권, 『진양속지』4권, 『진양속지 증보』2권이다. 이 중 『진양지』는 조선 광해군 14년(1622)부터 인조 10년(1632)에 걸쳐 성여신(成汝臣)이 편찬한 경상도 진주목 읍지로, 본래 2책으로 되었으나 목판본 인출 때 4권 3책으로 되었다. 그리고 『진양속지』는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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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광대로 효성이 깊어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실렸다. 어느 날 밤 호랑이가 군만의 아버지를 물고 달아났는데, 그는 하느님께 아버지가 무사하기를 빌며 활과 화살을 갖추어 산속으로 따라갔다. 날이 밝아 어느 골짜기에 이르니 그 호랑이는 이미 아버지를 다 뜯어 먹고 양지바른 곳에서 자고 있었다. 이에 군만은 “내 화살을 받아라”고 고함치며 살기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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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노비 고음동의 형이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왜구를 만났을 때 그 어머니가 병이 깊어지자 등에 업고 피난하여 어머니를 온전히 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두 팔이 성치 못하자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수저를 들어서 먹게 하였다. 진귀한 음식이나 신선한 과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가지고 돌아와 어머니께 드렸다. 두 명의 아우와 함께 살았는데 우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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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본관이나 부모 등은 알 수 없으며, 남편은 김대용(金大鎔)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적병을 만나자 정절을 지키고 죽었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선조 조에 열행이 알려져 조정에서 마을에 정려(旌閭)을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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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진주 백곡(栢谷)에 살았던 인물로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올라 있다. 유학(幼學)이며 효자로 명성이 있었다. 성품이 크고 담대하였다. 어버이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바쳐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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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진사 김명선의 아내이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도중에 산세가 험한 곳에 이르자 스스로 몸을 기울이니 결박된 것이 끊어지면서 떨어져 죽었다. 진주 영신대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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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김백산이 16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갈 지경에 이르자, 낫을 휘둘러 호랑이를 쳐서 아버지를 구해냈다고 한다. 이 일이 알려져 1478년(성종 9)에 정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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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김선명(金善鳴)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의하면, 1593년 임진왜란 중에 피하지 못하고 왜병에게 잡혔다. 저항을 하니 결박이 되어 소의 등에 실려 갔다. 매우 험한 곳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몸을 기울여 거꾸로 향하니 결박된 것이 끊어져서 떨어져 죽음으로써 그 절개를 지켰다.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크게 흠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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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개인에게 소속된 노비인 사노(私奴)이다. 부모와 형제에게 지극하여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부모들이 토지를 그 아우에게 모두 물려주었는데도, “나는 처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있으니 살아갈 수 있다”라고 하며 조금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노비가 재산을 소유했고, 여자도 상속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진주 시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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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정병(正兵) 김응봉(金應鳳)의 처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그 열행이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 진주성이 무너질 때 오랑캐에게 잡혔다. 그러나 구차히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적병을 향해 의연한 모습을 보이며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절개를 지키다 죽었다. 이 일이 알려져 정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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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첨사(僉使: 조선시대 일선 진영(鎭營)을 관장하던 무관직) 김진(金震)의 아내로 진주 가좌촌에 살았다. 『진양지(晋陽誌)』 권3「열녀조(烈女條)」에서 그 행적을 확인할 수 있다. 1593년(선조 26년) 임진왜란 중에 왜적으로부터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죽었으며, 중종 때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마을에 정문(旌門)을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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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태운(太運)으로, 학성(鶴城) 출신이다. 진주 상사리(上寺里)에 살았다. 천성이 매우 순하고 우직하여, 친척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이웃과도 화목하게 지냈다. 외족(外族)에 가난하고 의탁할 데가 없는 이들을 한집에 거느리며 키워서 남자는 장가를 보내주고, 여자는 시집 보내는 등 남을 돕는 데 힘썼다. 또한 예의범절이 발라 향리에서 모두 칭송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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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이나 가계사항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강조이[姜召史]’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남편은 보인(保人: 조선시대 군역을 지는 정군(正軍)에게 딸린 경제적 보조자)인 김축(金軸)이다. 남편이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주어 목숨을 구하였다. 진주 자매곡(自梅谷)에 살았다. 조이[召史]는 양반이 아닌 신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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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훈도(訓導)로 성품이 바르고 온화하면서도 절개가 있었다. 또한 예와 효를 행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비록 집이 가난하였으나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서 반드시 부모가 좋아하시는 맛있는 음식들을 갖추려고 노력하였다. 나이가 들어 어버이의 상(喪)을 당해 애통해 하였는데, 예(禮)를 갖추어 채소와 과일을 먹지 않고, 3년 상을 치르는 동안 죽만으로 연명하였다. 이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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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의 재상·장군. 자는 태(泰). 태종무열왕의 9세손으로 증조부는 상재를 지낸 이찬(李湌) 김주원(金周元)이고, 할아버지는 시중을 지낸 소판(蘇判) 김종기(金宗基), 아버지는 시중을 지낸 파진찬(波珍湌) 김장여(金璋如)이다. 822년(헌덕왕 14) 당나라에 건너가 숙위(宿衛)하고 1년 뒤에 귀국하였는데, 귀국 즉시 남원태수를 제수받고, 여러 번 승진하여 강주(지금의 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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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선무랑(宣武郞, 조선시대 종6품의 문관 품계) 남정소(南廷召)의 부인이다. 진주 원당촌에 살았다. 지조가 뛰어나 마을에는 정문(旌門)을 내려주었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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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자.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진주 어느 절의 노비로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어버이에게 바치는 효성만은 누구 못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늙은 어머니를 업고 떠돌아다니면서 걸식하여 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힘을 다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고, 담제(禫祭: 대상을 치른 다음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를 지낸 뒤 비로소 고기를 입에 넣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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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진주의 읍지인 『진양지(晋陽誌)』에서 단목마을에 대해 “토지가 척박하고 가뭄이 자주 든다. 사족들이 많이 거주하여 관직자가 끊이지 아니하였고, 마을의 풍습은 시서(詩書)를 숭상하고 효우(孝友)를 돈독히 한다”고 평가할 정도의 전형적인 반촌(班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토지가 척박하고 가뭄이 자주 들었다고 하였는데, 이 문제는 단지공 하협이 지내에 천방사업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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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진주성 동쪽지역으로, 옛 행정구역 또는 행정지명 중 하나. 조선 전기에는 자연촌락의 성장과 중앙집권화의 진행에 의해 중앙권력이 군현의 하부단위인 촌락에까지 개입하게 되면서 면리제라는 촌락운영체계가 형성되었다. 경국대전에 5호(戶)를 묶어 1통(統)으로, 5통을 묶어 1리(里)로 한다고 규정하고, 몇 개의 리를 묶어 면(面)으로 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읍치를 중심으로 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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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과 초장동 사이에 있는 고개.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 일대, 마치(馬峙)[말티고개, 말고개]의 고도는 약 50m 정도이다. 경상남도 진주시의 남동쪽에 위치한 선학산 마루를 지나는 고갯길로, 경상남도 의령 방면으로 빠지는 길목이다. 이 고개의 북쪽에 있는 바위 위에 말의 발자국 모양이 찍혀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어떤 장수가 말을 타고 넘나들 때 생긴 흔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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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사노비(私奴婢)로 진주 백곡리에 살았다. 산골짜기에서 밭을 갈고 있는데 지나가는 중이 그를 욕보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막지는 목숨을 걸고 이에 저항하였다. 중이 낫을 당겨 목을 누르며 위협하였으나 욕을 하면서도 따르지 않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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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망경동에 있는 산. 망경산(望京山)이라고도 한다.『진양지』에는 “망진산은 주(州)의 남쪽 강변을 넘어 6리에 있다. 『동국지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망진(望晉)은 곧 망진(網鎭)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망경’이라는 명칭은 고려 때 어느 충신이 역적으로 몰려 귀양살이를 와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늘 이산에 올라와 북쪽(서울)을 바라보았다는 전설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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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효자인 사간(司諫) 모순(牟恂)의 후손이다.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성품이 바르고 충효로웠으며 온 힘을 다해 예를 행하였다. 부모가 함께 죽자 연복 6년을 하였다. 사람들이 그 효성과 예절에 탄복하고 흠앙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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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중종 조에 정려된 효자 박인(朴氤)의 손자이다. 진주 말동리(末洞里)에 살았다.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재산을 나눌 때 스스로 매우 적게 가지려고 하였고, 이후에도 형제 가운데 군색하고 모자라는 이가 있으면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주었다.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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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중종 조에 정려된 효자 박인(朴氤)의 손자이다. 언제나 『소학(小學)』 한 부를 가지고 다녔으며, 몸을 다스리는데 빈틈이 없었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는 죽만 먹었으며, 애통해하는 것이 낮밤을 가리지 않았다. 항상 관 옆에 있었으며 상복을 벗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올리매 친히 그릇을 씻고 음식을 들었다. 또한 사당의 의례와 법도를 분명히 하였다. 모든 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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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본관은 태안(泰安). 자는 자복(子馥), 호는 호은(湖隱)이다. 진주 말동에 살았다. 부모상을 당하였는데, 당시 연산군의 폭정으로 3년 상을 못 치르게 할 때였으나 개의치 않고 3년 시묘를 예대로 치러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중종반정 후 1509년(중종 4) 박인의 효성이 조정에 알려져 표창을 받고, 정려가 세워졌다. 『진양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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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가계나 활동사항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과 효행만이 기록되어 있다.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바치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진주 비라곡리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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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속명(俗名)은 하일천(河一千)으로 사인(士人) 하극충(河克忠)의 아들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백천사(百泉寺)에 살면서 해상(海上)의 고기잡이와 친하게 지내어 고기를 얻어서는 즉시 그 어머니에게로 돌아가서 드리는 등, 달고 맛있는 음식은 언제나 어머니에게 가져다주었다. 만년에는 정촌서재(鼎村書齋)에 거주하면서 어머니를 위하여 향도계(香徒契)에 들어 힘을 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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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황수장(黃壽長)의 아내로, 사비(私婢)였다. 스무 살에 남편을 잃었는데, 상복을 벗지 않고 매우 애통해 해서 몸이 상할 정도였다. 아버지가 불쌍히 여겨서 개가(改嫁) 시키려 하였지만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진주 청원리에 살았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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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진주목 진주성의 북쪽지역으로 옛 행정구역 또는 행정지명 중 하나. 조선 전기에는 자연촌락의 성장과 중앙집권화의 진행에 의해 중앙권력이 군현의 하부단위인 촌락에까지 개입하게 되면서 면리제라는 촌락운영체계가 형성되었다. 경국대전에 5호(戶)를 묶어 1통(統)으로, 5통을 묶어 1리(里)로 한다고 규정하고, 몇 개의 리를 묶어 면(面)으로 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읍치를 중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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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진산(鎭山)인 비봉산과 관련된 읍치 풍수, 취락 및 주택 풍수, 비보 풍수, 풍수설화 등의 풍수적 사실과 역사적 경관, 그리고 옛 진주 주민들의 비봉산에 대한 문화생태학적인 환경지각과 그 의미를 포함하는 말. 진주의 비봉산은 진주 도심의 북쪽에서 시내를 에워싸고 있는 표고 162m의 나지막한 산으로서 동서로 크게 날개를 펼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서쪽 날개는 두고개(13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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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의 표면이 주위의 땅보다 높이 솟은 부분. 산지의 고도는 일정한 기준은 없으나 일반적으로 수백m 이상의 것을 말하며, 그 이하의 것은 구릉(丘陵)이라 한다. 진주시 산지를 분류해 보면 동부 지역은 오봉산(524.7m)·방어산(530m)·깃대봉(520.6m) 등이 연결되어 산맥을 형성하고 있고, 서부 지역은 덕천강을 경계로 하동군과 경계를 접하고 있으며, 경호강과 남강으로 이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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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진주의 행정구역 중 하나. 조선시대 진주성 서쪽지역으로, 현재 평거동, 대평면, 수곡면 지역과 하동군 화개면, 악양면, 적량면, 옥종면, 청암면, 횡천면 일부와 사천시 축동면, 산청군 시천면, 삼장면, 단성면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고려 태조 23년(940) 3월에 강주(康州)를 진주(晋州)로 개칭하면서 처음으로 지금의 진주라는 지명이 등장하게 된다. 이후 성종 2년(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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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본관은 창녕. 자는 추지(樞之). 성종 때 교리를 지낸 성안중(成安重)의 손자로, 성일휴(成日休)의 아들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지성으로 모시면서 법도에 어긋남이 없도록 했으며,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서는 6년간의 시묘살이로 자식된 도리를 다했다. 어머니가 먼저 별세하여 서모를 모셨는데, 서모도 친모처럼 섬겼으며, 서동생들도 친동생같이 돌보았다. 서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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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화(子華). 성안중(成安重)의 아들이며, 성일휴(成日休)의 아우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따르면 성일장(成日章)은 재예(才藝)가 남보다 뛰어나고 학문적인 명성이 일찍 알려져서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불행하게도 급제를 하여 그 이름을 날리지는 못해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강응규(姜應奎), 강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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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경(子慶), 호는 무심옹(無心翁). 교리(校理) 성안중(成安重)의 셋째아들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따르면 강호에 은거하여 영리를 멀리 하였으며 자호를 무심옹(無心翁)이라 하고 초당은 무심정(無心亭)이라 일렀다고 한다. 방당(方塘)에 임하고 자연을 대할 때에도 모두 무심으로 이름 지었다. 손수 ‘피를 엮어 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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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효심이 깊어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사노(私奴)였던 승남은 궁노장(弓弩匠: 활과 쇠뇌를 만드는 장인)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쇠뇌[노(弩)]를 묻어놓은 곳에 갔다가 호랑이가 아버지를 물어갔다. 동행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피하여 달아났지만, 홀로 호랑이와 맞서 싸워 아버지를 구했다. 진주 시천리(矢川里)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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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고령, 자는 양중(養中). 신숙주(申叔舟)의 후손이다. 진주 조동에 살았다. 천성이 진실하고 소박하였으며, 어버이를 섬기고 스승을 섬김에 정성과 살핌을 극진히 하였다. 또한 행동에도 예를 지키고 모자람이 없어 손님과 친구를 접대하는데 그 정성을 다하였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한결같은 이라고 칭송하였다. 수우당 최영경(崔永慶)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진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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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거창, 자는 사훈(士勳)이다. 진주 백곡리에 살았다. 기질이 헌앙(軒昻)하였고, 맑고 고고함으로 자신을 지켰다. 학문에 힘써 배우기를 즐겼다. 또한 뒤늦게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조금의 교만함도 없었다. 조식이 그를 칭찬하여 “이 사람은 천성이 맑고 고고하다. 아는 것과 식견이 통달하고 분명하다. 비록 시와 예를 아는 이름난 유학자라도 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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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원래 순창(淳昌)의 사인(士人)이다. 호남에서 옮겨와 진주 덕산(德山)에서 살았다. 사람됨이 기개가 크고 효성스러웠다. 아버지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죽만 먹었으며, 밤낮으로 슬퍼하였다.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서 마을에 정문(旌門)을 내려주었으며, 그 효행이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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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고령. 자는 군흡(君洽).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따르면 사람됨이 평안하고 조용하며 스스로 지키어 명리를 구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따로 서당을 지어 후진들을 가르치는데 힘썼으며 날마다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어 스스로 즐겼다 한다. 진주 조동(槽洞)에 살았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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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자는 사운(士雲)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따르면 양응룡(梁應龍)은 그 천성이 속되지 않고 뛰어나 사람들과 함부로 교유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을 익혔다. 진주 운곡(雲谷)에 살았다고 전한다. 진주에는 남명 조식의 학통을 이어받은 선비들이 많은데, 양응룡도 그 가운데 한 명으로 조선시대 진주의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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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의 효자.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성심껏 섬겼으며, 후에 어머니상을 당하여 3년간의 시묘살이를 정성껏 했다. 하루는 까마귀가 향로상 위에 얹어 놓은 모래그릇을 물고 날아가 버렸다. 그러자 여효제는 자신의 효성이 까마귀보다도 못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크게 탄식하였다. 그러자 그 날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3일 후면 그 모래그릇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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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사노(私奴)였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그 행적이 전한다. 아우인 여상(汝祥)을 대신하여 북쪽으로 군역을 수행하러 떠났는데, 이는 아버지가 아우를 가장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대신 군역을 짊어져 아버지를 편안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정성을 다하여 상을 치렀으며, 아우도 극진히 보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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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개가 높은 여자. 열녀는 일반적으로 위난을 당하여 죽음으로 정조를 지켰거나 또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고난과 싸우며 수절하거나 남편을 위해 헌신한 여인을 일컬으며, 열부(烈婦)나 절부(節婦)를 통칭한다. 열녀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과부가 되면 마땅히 수절을 하여야 하고, 위난을 당하면 목숨을 바쳐 정조를 지키는 것이 부녀자의 도리로서 정착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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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 소장 효행관련 고문서. 「오응운등상서」는 효자 하진태의 포증을 건의하는 경상우도 유생들의 건의서이다. 하진태의 노모를 향한 지극한 효행을 기리고 정려를 받기 위한 상서문은 하진태의 생존시부터 시작하여 사후에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오응운, 최상갑, 정운현 등 진주 일원의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진정서를 올린 일종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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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따르면 오인(吳仁)은 아버지가 등에 커다한 부스럼이 나서 매우 심해져 거의 죽을 지경이 되자 직접 입으로 농즙(膿汁)을 빨아서 낫게 하였다고 한다. 진주 수곡리(水谷里)에 살았다. 진주는 유교적 덕목이 뿌리 깊게 이어지는 예향(禮鄕)으로 오인을 비롯한 많은 효자를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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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의 호족. 처음 강양군(江陽郡) 의상현(宜桑縣)[泉州縣이라고도 하였으며 지금의 宜寧]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떨쳤으며, 뒤에 강주(康州)[지금의 경상남도 진주] 지역도 석권하였다. 924년(경명왕 8)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를 자칭하고 중국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냈다. 927년에는 후당이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왕봉규를 회화장군(懷化將軍)으로 봉하자, 사신을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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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 쪽 가계는 알 수 없고, 어머니는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보이는 박인(朴氤)의 천첩 후손이다. 사노비(私奴婢)였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매우 슬퍼하면서, 육식을 먹지 않았다. 사람들이 먹기를 권하면 형도 먹지 않는데 내가 어찌 먹겠냐고 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3년 동안 그 생활을 유지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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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서재. 박승임(朴承任)[1517~1586]은 본관은 반남, 자는 중포(重圃), 호는 소고(嘯皐)로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조좌랑 등을 거쳐 정언(正言)을 지내고, 소윤(小尹)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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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화가.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자고(子固)·성유(聖攸), 호는 수운(峀雲)·가산(茄山). 『진양지』에 따르면 묵죽을 잘그렸다는 유진동(柳辰仝)의 6대손이며, 유혁연(柳赫然)의 종손이자 사간(司諫) 유성삼(柳星三)의 아들이다. 벼슬은 종2품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묵화(墨畵)로 대나무를 잘 그렸는데, 조선 중기의 이정(李霆), 조선 후기의 신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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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중옥(仲玉). 아버지는 효력부위 유수창(兪壽昌)이다. 1492년(성종 23)에 태어났으며 졸년은 모른다. 진주 정촌(鼎村)에 살았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중종 때 진사에 급제하였다. 진사에 급제한 뒤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에 뜻을 깊이 두어 후학들을 일깨우는 것으로 자기의 소임을 삼았다. 그와 함께 사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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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추보(樞甫)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따르면, 1540년(중종 35)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46년에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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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임진왜란 때 부장(部將)으로 공을 세운 유홍(柳洪)의 딸이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진주성전투 때 왜적에게 붙들렸으나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그 열행이 기록되어 있다. 조정에서 정문(旌門)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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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정가(靜佳), 호는 역옹(櫟翁). 수찬 윤효빙(尹孝聘)의 둘째 아들이다. 진사에 합격하고 맏형 윤선(尹宣)과 함께 학문에 힘써 일찍이 높은 문명(文名)을 이루었다. 특히 사부(詞賦)에 뛰어났다고 한다. 진주 신당리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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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효자. 윤사관(尹思寬)은 부장(部將) 윤춘란(尹春蘭)의 아들이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윤사관이 살고 있던 집에 큰 불이 나서 노모가 방에 있으면서 나오지 못하자 직접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어머니를 업고 나오다가 불꽃에 쓰러져 모자가 함께 죽었다고 한다. 진주 대여촌(代如村)에 살았다.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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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조선 전기의 선비 윤여훈의 처이다. 진주 가좌촌에 살았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의 진주성전투 때 왜적을 만나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 조정에서 정문(旌門)을 내렸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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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유학자 윤탁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남편인 윤탁이 병이 들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게 함으로서 소생시키는 등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다고 한다. 진주 금산리(琴山里)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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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아버지는 참봉 이일민(李逸民)이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따르면, 아버지가 중풍을 앓아서 한쪽 발이 불편하였는데, 언제나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아버지를 업고 산에 숨었는데, 아버지가 적에게 발견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자신의 몸을 던져 적과 함께 죽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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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효자 이경훈(李敬訓)의 아내이다. 진주 대여촌에 살았다. 임진왜란 때 남편과 함께 산골 깊이 피난하다 산골을 마구 뒤지던 왜적에게 붙들리게 되었다. 남편은 그 자리에서 무참히 살해되고 자색이 아름다운 부인은 그들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데 달탄(達灘)에 이르렀을 때 왜적의 눈을 피해 강물에 몸을 날려 절개를 지키고 죽었다. 숙종 때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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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인숙(寅淑). 재예가 탁월하여 여러 번 식년과에 응시했으나 결국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후에 경기전(慶基殿) 참봉으로 제수되었다. 평소에 술을 즐겨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서울에도 집이 있어 중요 기관에 아는 이가 많았으나 높은 벼슬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네 명의 형제들과 더불어 서로 화목하니 당시 사람들이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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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직경(直卿). 문음으로 옥과(玉果) 현감에 제수되었다. 집에 있을 때에도 예로써 몸을 단정히 하였고, 자제들이 허물이 있으면 성년이 되어서도 매를 들었다. 향인과 더불어 술자리를 가지더라도 흐트러짐이 없고, 의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듣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냈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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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가 돌아가자 3년 동안 죽만 먹으며 크게 슬퍼하였는데, 결국 몸이 쇠약해져 거의 실성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진주 백곡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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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조선 전기의 문신인 이인형(李仁亨)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올라 벼슬이 승문원 정자에 이르렀다. 진주 가좌촌에 살았다고 하며,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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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의금부도사인 이번(李蕃)의 아내이다. 진주 운곡리에 살았다. 임진왜란 때 왜적과 맞부딪혀 싸우다 죽음으로써 그 고귀한 절개를 지켰다. 숙종 때 이르러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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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옥오(玉吾), 호는 운당(雲塘). 기국이 웅위(雄威)하고 용모가 수려하였다. 어릴 때부터 도량이 커서 『소학(小學)』과 사서(四書)를 힘써 공부하여 유학에 정통하였다. 특히『대학(大學)』의 「성의(誠意)」편을 몸소 실천하여 체득하려 노력하였으며, 실제로 효우(孝友)가 지극하여 부모를 섬김과 형제를 사랑하는 데 도(道)를 다하였다.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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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화백(和伯). 호군 이침(李琛)의 손자이다. 『진양지(晋陽誌)』권4「사마조(司馬條)」에 의하면, 학행과 문장이 있어 1582년(선조 1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성(誠)의 한 글자는 다만 배우는 것만으로 중시되는 것이 아니니 사군자(士君子)는 일용(日用)으로 벗어나지 아니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자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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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여주(驪州). 자(字)는 문재(文哉). 아버지는 이만영(李晩榮)이다. 1556년(명종 11)에 태어나 진주 반동산에 살았다. 1579년(선조 12)에 생원에 합격하였으며, 성질이 단중하고 언론이 적당하며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였다. 재주가 있었으나 뜻을 펴보지 못하고 1593년 진주성이 함락될 때 죽었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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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재령. 할아버지는 현감 이공보(李公輔), 아버지는 이득분(李得賁), 남편은 이유성(李惟誠)이다. 진주 초문에 살았다. 어릴 때부터 부모를 지성으로 섬겼고, 시집가서도 부인의 도리를 잘 지키면서 시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다. 지아비가 죽자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빈소에서 16일 동안 엎드려 쌀알 하나도 목으로 넘기지 않았다. 3년상을 치르고 난 후 3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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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이유해의 아내이다. 진주 종화리에 살았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하여 집현산으로 숨었는데 뜻하지 않게 왜적을 만나게 되었다. 왜적은 하씨를 억지로 자기의 말 위로 끌어 올렸다. 잠자코 기회만 노리고 있는데 물을 건너게 되었다. 그 강의 절반쯤에 이르렀을 때 업고 있던 아기와 함께 몸을 날려 강물에 빠져 죽었다. 하씨는 뛰어난 미인이었던 터라 왜적은 그 죽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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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함안. 자는 공부(公夫), 호는 매헌(梅軒). 아버지는 대사성을 지낸 이미(李美)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로 강비호(姜匪虎)의 딸이다. 1436년(세종 18) 태어나 15세부터 문명이 널리 알려졌으며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배웠다. 1455년(세조 1)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젊은 나이에 출사하는 것은 교만한 성품을 기른다고 하면서 집에서 문을 닫고 독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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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수(子修), 호는 신암(新菴). 참봉을 지낸 이공량(李公亮)의 아들이며, 영남의 대학자인 조식(曺植)은 그의 외숙이다. 1524년(중종 19)에 태어나 1549년(명종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제수되었다. 1554년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 이후 홍문관수찬사헌부지평 등 청요직에 있으면서 당시의 권신 윤원형(尹元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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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재령. 자는 경현(景顯), 호는 행정(杏亭). 할아버지는 이간, 아버지는 이유성이다. 어머니 이씨부인은 현모양처로 그 행실이 『진양지(晋陽誌)』에 잘 나타나 있다. 6세와 9세에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 이대기 아래에서 품행이 단정하고 영리한 소년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성장하였다. 꾸준한 수행의 과정을 거쳤으며, 향시에 합격한 후에 향리인 진주에 머물면서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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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재령. 자는 경휘(景輝), 호는 행와(杏窩). 할아버지는 이간, 아버지는 이유성이다. 이중광(李重光)은 그의 아우이다. 어머니 이씨부인은 현모양처로 『진양지(晋陽誌)』에 그 행실이 잘 나타나 있다. 어린 시절에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 아래서 성장하며, 성실하게 학문을 익히고 실천하였다. 유일(遺逸: 재야의 어진 선비)로 천거되어 재랑(齋郞)을 제수 받고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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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자중(子中). 이공청(李公淸)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강개하고 조행(操行)이 있었다. 극진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겨, 비록 전란으로 피난해야 할 상황에서도 반드시 그 예를 다하였다. 불행히도 일찍이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진주 대여촌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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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부, 열녀. 매헌(梅軒) 이인형(李仁亨)의 자부이며, 이핵(李翮)의 처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딸이다. 14세 때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어머니에게 마시게 하여 중병을 낫게 하였다. 시집와서는 시부모 섬김에 있어서 지성이었으며, 남편이 죽자 뒤따라 자결하였다. 나라에서 이 사실을 알고 진주 가좌촌(嘉佐村)에다 효열부 정문을 세웠다. 현재 경상남도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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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자무(子武). 이구암(李龜岩)의 손자이며, 이응인(李應寅)의 아들이다. 기질이 순미하고 천성이 효우스러웠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생원과 진사를 함께 합격하였다. 할아버지가 종기를 앓아 병세가 매우 위중해지자 이호변이 항상 입으로 그 농즙(濃汁)을 빨아서 종기를 낳게 하였다.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응분의 보상을 받지 못하니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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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에서 1598년 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일어난 전쟁. 1587년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내부의 정치적 분란을 해소하고, 국제교역상의 불리를 타파하기 위해 중국 침입을 통한 체제 변혁전쟁을 구상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 가도입명(假道入明)을 요구하면서 1592년 4월 13일 부산포 상륙을 시발로 하여 조선 침략을 시작하였다. 조선은 관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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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수군 장억수(張億守)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왜군에 맞서 절개를 지키다 죽었는데, 이 일이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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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첨지(僉知) 정계원(鄭繼元)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 에 의하면, 1597년 정유재란 당시 항절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그가 피란했을 때에 그의 남편에게 말하기를 "적을 만나 정절을 잃게 되면 나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라 하여 죽음으로서 정절을 지킨다는 뜻을 평소에 정했던 것이다. 진주 정촌(鼎村)에 살았다. 선조 때 항절이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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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녀·열부. 비록 천한 출신이었으나 효심이 남달라 임진왜란의 난리 속에서도 늙은 어머니의 병을 지성으로 돌보았고, 세상을 떠나자 오래도록 어머니를 사모해 맛있는 음식이 생겨도 먹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때마침 언니와 함께 피난을 갔는데, 언니가 역질에 걸려 걷지 못하므로 그를 업고 30리길을 달려서 마침내 낫게 하였다. 또한 남편에게도 착실하여 모두 칭송하였다.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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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역학자·선비. 자는 이남(以南)이다. 1558년(명종 13)에 생원 시험에 합격하였다. 진주 진성면 동산리 월정마을에 살았다 하여 사람들이 동산옹(東山翁)이라고 불렀다. 효성이 지극했으며, 이름을 숨기고 재주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우람한 체구에 소탈한 성격이었으며,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자 부귀영화에 초연하여 스스로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재기가 탁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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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열녀. 영암의 선비 최인우(崔仁佑)의 딸로서, 주(州)의 호장(戶長) 정만(鄭滿)의 부인이었다. 1379년에 정만이 일로 인하여 서울에 갔더니 적이 마을에 들어왔다. 적이 최씨에게 칼을 들이대고 협박하므로 나무를 안고 막다가 화를 내며 적들을 꾸짖고 죽었다. 1389년에 도찰사(都察使) 장하(張夏)가 조정에 최씨의 열행을 알려 정문(旌門)을 명령하고 아들 정습(鄭習)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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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장기(長鬐). 자는 중상(仲祥). 일찍부터 문명이 있었으나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남을 대접함에 있어서는 정성으로써 하였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공평하게 하였다. 강심(姜深), 신점(申霑)과 더불어 요역(徭役)시행을 시정하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며 진양(晋陽)의 삼로(三老)라고 일렀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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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고려 때 사정(司正)을 지냈다. 묘를 대동(大同)에서 지키며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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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숙성(叔成). 호는 삼계(三溪). 훈도 정관(鄭寬)의 아우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 에 의하면, 1543년(중종 38)에 진사가 되고, 1558년(명종 13)에 문과에 올랐다. 천성이 정성스럽고 고졸하여 벼슬에 나아가서는 청렴하여 관원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따랐고, 백성들은 공경하였다. 세 고을에 부임하였으나 추워도 앉을 방석이 없을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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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양. 자는 자유(子), 호는 애일당(愛日堂). 할아버지는 정신중(鄭臣重)이고, 문정공(文定公) 정이오(鄭以吾)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경승부승(敬丞府丞)에 이르렀고, 1416년(태종 16)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이조좌랑·승문원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422(세종 4)년부터 1438년까지 사간원헌납, 함길도경차관, 승정원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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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음(湖陰)이다. 부사 정광보(鄭光輔)의 아들이며,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조카이다. 1507년(중종 2)에 진사가 되고,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1516년 황해도도사로서 문과중시에 장원하였으며 사간을 거쳐 1523년 부제학이 되었다. 1534년 동지사(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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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유학 정삼성(鄭三省)의 처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모녀(母女)가 함께 절개를 지키다가 죽었다. 진주 영이곡(永耳谷)에 살았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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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이신(而信). 대제학을 지낸 정척(鄭陟)의 아들이다. 출생년은 미상이다. 1474년(성종 5)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1475년(성종 6)에는 홍문관부응교로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폈다. 1479년 수찬으로 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다. 그 뒤 해주목사와 경기도경차관,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렀는데, 이때 해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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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의 효자. 정유(鄭兪)와 더불어 지선주사(知善州事) 정임덕(鄭任德)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에 아버지를 따라 하동군(河東郡)을 지키고 있었는데, 왜병이 밤을 타 갑자기 쳐들어 왔다. 이때 많은 무리들은 모두 도망쳐 달아났으나 정임덕은 병이 들어 말을 탈 수가 없었다. 이에 정손과 정유 두 형제가 아버지를 붙들어 끼고 달리는데 적이 뒤쫓아 왔다. 정유가 말을 타고 수십 인을 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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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현감 정세창(鄭世昌)의 아들로, 형은 정인평(鄭仁平)이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따르면, 정순평은 만년이 되어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애통해하며 죽만 마시다가 상중에 죽었다. 진주 진성리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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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의하면, 정승개는 천성이 착하고 친족들과 돈독하게 지냈으며 이웃에게 화목하였다. 여러 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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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전주최씨 최운개(崔云凱)의 딸로, 진주인 승사랑(承仕郞) 정승업(鄭承業)의 아내다.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칼을 차고 스스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만일 불행한 일을 만나게 되면 나는 반드시 이것으로 죽음을 결단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를 넘겨 1593년에 왜적이 이웃 마을을 핍박하여 거의 모두 죽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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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효자. 자는 임중(任中), 호는 남계(南溪). 교도(敎導) 정관(鄭寬)의 아들이다. 1570년(선조 3)에 진사가 되었다. 평소 효성이 깊고 지극하여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 상례를 예로써 하고 깊은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도 상복을 벗지 아니하였다.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발을 밖에 내지 아니하고 죽을 마시며 슬퍼하니 보는 사람이 모두 탄복하였다. 악한 것을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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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호는 매죽당(梅竹堂). 첨정을 지낸 삼계 정밀(鄭蜜)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 21) 생원에 합격하였다. 부사(浮査) 성여신(成汝臣), 창주(滄洲) 하증(河憎) 등을 따라 『진양지(晋陽誌)』를 편찬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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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자는 계인(系仁), 호는 용담(龍潭). 첨정을 지낸 삼계 정밀(鄭蜜)의 아우이다.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있어 1570년(명종 3)에 장원으로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고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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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진주 출신. 호는 우곡(偶谷). 정승을 지낸 정석(鄭碩)의 아들이다.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청맹(靑盲 : 겉은 멀쩡하나 실제는 눈이 안 보임)을 앓는다고 핑계대고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말년에는 진주 사봉면 사곡리에 우곡정(隅谷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가 여러 번 초빙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신하를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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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효자. 선산군수를 지낸 정임덕(鄭任德)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아버지의 임지인 하동에서 동생과 함께 변경 수비 임무를 맡고 있었다. 때마침 왜구가 갑자기 침입하자 동생 정손(鄭愻)과 함께 병석에 있는 아버지를 호위하여 모시고 피란 갈 때 왜구들이 뒤쫓아 와 해치려 하자, 말을 달려 공격을 하며 사력을 다해 물리쳤다. 그러나 동생 정손은 적의 칼에 찔려 젊은 나이에 죽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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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사과(司果) 정형손(鄭亨孫)의 아들이며, 정항(鄭沆)의 아버지다. 생몰년은 미상이며, 진주 대여촌(代如村)에 살았다. 활쏘기를 비롯한 무술에 뛰어났고 명장의 풍모가 있었다. 1489년(성종 20)에 무과에 합격한 후 함경도 군관을 거쳐 우도수사(右道水使)에 올랐다. 1509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듬해 삼포왜란이 일어나 웅천(熊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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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호는 면재(勉齋). 평장사를 지낸 정연(鄭椽)의 아들이다. 1320년(충숙왕 7) 국자시에 합격하여 1345년(충목왕 1) 정당문학이 된 후 국정에 참여하였으며, 이어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졌다. 1352년(공민왕 1) 당시의 권세가 조일신(趙日新) 세력의 배경으로 찬성사가 되었으나 곧 조일신이 주살되자 그 일파가 함께 투옥되었다가 광양군수로 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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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진주 금산리에 살았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남편 정응발(鄭應發)이 왜적을 만나 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거의 죽게 되었는데 황씨가 풀숲 속에서 나와서 돌을 안고 돌진하여 남편을 구하였다고 한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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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진주 대평에 살았다.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죽만 먹고 지냈으며 제사를 모실 때는 예로써 하였다. 또 명종 승하 시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진양지(晋陽誌)』 권3 「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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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우곡(愚谷). 찬성사 정신중(鄭臣重)의 아들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1376년(우왕 2) 예문관검열이 된 뒤, 삼사도사, 공조·예조의 정랑, 전교부령(典校副令) 등을 역임하였다. 1394년(태조 3) 지선주사(知善州事)가 되었고, 1398년 봉상시소경(奉常寺少卿)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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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현감을 지낸 생원(生員) 정세창(鄭世昌)의 아들이다. 진주 진성리에 살았다. 나이가 들어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슬픔에 몸이 상할 정도였으며, 죽만 먹어 겨우 연명하였다. 아우인 만호(萬戶) 정순평(鄭順平)도 역시 죽으로 연명하다가 상중에 죽었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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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진주 성태동(省台洞)에 살았다. 그 어머니와 함께 밤중에 방아를 찧던 중 어머니가 범에게 물려가게 되자 절구공이를 가지고 급히 쫓아가서 위험에 처한 어머니를 구했다고 한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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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제옹(濟翁).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정척(鄭陟)의 손자이고, 조선 전기 진주 출신의 문신인 정성근(鄭誠謹)의 아들이다. 1472년(성종 3)에 태어나 1501년(연산군 7) 문과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박사를 지냈다. 일찍이 그 아버지의 성품이 강직하여 연산군의 귀에 거슬리는 간언을 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께 물러날 것을 진언하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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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양. 자는 명지(明之), 호는 정암(整菴)·창재(暢齋). 아버지는 증호조판서 정설(鄭舌)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晋州姜氏)로 산원(散員) 강우(姜祐)의 딸이다. 1408년(태종 8)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41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세종대에서 세조대에 걸쳐 지승문원사, 첨지중추원사를 거쳐 공조·호조·예조의 참의, 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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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수문장을 지낸 정천계(鄭天啓)의 아내로, 진주 송곡리(松谷里)에 살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해를 당하였다. 그의 딸이 곁에 있다가 스스로 못에 빠져 죽었는데, 그때 나이 16세였다. 후에 이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되었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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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진사 정대호(鄭大護)의 아들이다.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어머니가 병들어 점점 심해지니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올리는 등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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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사응(士膺). 정인평의 양자이다. 성품이 순후하며, 모자라거나 지나침이 없었다. 또한 예를 행함에 있어서도 그 정성을 다하였으며, 행동하는데 조금의 잘못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탄복하고 칭찬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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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유학(幼學) 정훈(鄭薰)의 처이다. 진주 설매곡에 살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남편 정훈이 적에게 살해당하고, 적병들이 이씨를 욕보이려고 하자 두려워하지 않고 적에게 대항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선조 조에 행적이 알려져 정려되었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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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현감인 정희건(鄭希騫)의 첩이다. 진주 대여촌에 살았다. 정희건이 경성에서 벼슬을 하게 되자 성씨에게 글을 보내어 인연을 끊자고 하였다. 문족들이 그녀의 나이 어린 것을 가련하게 여겨 다른 이를 따르라고 권하였으나 죽을 때까지 절개를 지켰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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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정희립(鄭希立)의 처이다. 진주 가귀곡리에 살았다. 정유재란 때 적군에 쫓기어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낭떠러지에서 스스로 떨어져 목숨을 끊고 정절을 지켰다. 마을에 정려문이 세워졌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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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생원 정변소(鄭卞韶)의 딸이며, 정희성(鄭希聖)의 처이다. 진주 주내에 살았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 진주성이 함락될 때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적을 꾸짖으며 의연히 죽어 정절을 지켰다. 정려문이 세워졌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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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1392년(태조 1) 진주를 진양이라 하고 태조현비의 내향이므로 목을 높여서 진양대도호부라 개칭, 진양대도호부사를 두었다. 1402년(태종 2) 진양을 진주로 고치고 대도호부를 목으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의 대대적 개편 때 진주는 목으로서 정3품의 목사가 배치되고, 그 아래 판관(종5품)과 교수(종6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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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 자는 문위(文偉). 현령을 지낸 조안중(曺顔仲)의 아들이다. 1434년(세종 16)에 태어나 1475년(성종 6) 문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에 발탁되었다. 1478년 이조좌랑에 재직 중 평안도에 파견되어 민심을 회유하였다. 1479년 건주위(建州衛) 여진을 정벌할 때 도원수 윤필상(尹弼商)의 종사관이 되어 참전하였고, 이듬해 적진 깊숙이 들어가 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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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본가는 삼가판현(三嘉板峴)[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지역]에 있었고, 토동(兎洞)은 외가이다. 아버지는 조언형(曺彦亨)으로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를 지냈으며 강직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어머니는 인천이씨(仁川李氏)로 충순위(忠順衛) 이국(李菊)의 딸이자 좌의정(左議政) 최윤덕(崔潤德)의 외손녀였다. 조식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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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창녕. 할아버지는 울진현령 조안중(曺顔中)이고, 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조숙기(曺淑沂)이다. 어머니는 정유의(鄭攸宜)의 딸이다. 진주 송곡리에 살았다. 1502년(연산군 8) 무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선전관이 되었다. 1506년 유빈(柳濱)·윤상로(尹漡老) 등과 협의하여 연산군을 폐하려 하였으나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의 반정이 먼저 성공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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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백유(伯由), 호는 대소헌(大笑軒). 아버지는 참봉 조언(趙堰)이며, 어머니는 대사성 강로(姜老)의 딸이다. 진주 소남리에 살았다. 1537년(중종 32) 태어나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한 뒤 천거로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이 되었다. 그 뒤 사도시직장(司䆃寺直長)·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장례원사평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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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승지(承旨) 조지서의 아내이다. 1505년에 남편이 죽고 재물과 집이 전몰되자 정씨는 그 곁에 여막을 짓고 남편의 유의를 걸어놓고 제사를 올리면서 3년상을 치렀다. 1507년(중종 2)에 정려되었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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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사노(私奴)였다. 어머니가 나이 들자 봉양하는데 효성을 다하였고, 돌아가시자 장사에 정성을 다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는 사죽리(沙竹里)에 살았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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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여양(驪陽). 자는 경직(敬直), 호는 백곡(栢谷). 청백리 진유(陳猷)의 증손이다. 아버지 부제학 진식(陳寔)이 간신 김안로(金安老)의 죄를 극언하고 화를 피하여 진주로 내려왔다. 원래 진식은 진극경의 당숙이며, 생부는 생원 진정(陳定)이다. 효자로 이름을 남긴 진인(陳寅)의 아버지이다. 1546년(명종 1) 진주 백곡촌에서 태어나 마동에서 살았다.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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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여신(成汝臣)이 편찬한 경상도 진주목 읍지. 1622년(광해군 14)부터 1632년(인조 10)에 걸쳐 편찬하였는데, 정구(鄭逑)가 1587년(선조 20) 편찬한 『함주지(咸州誌)』(경상도 함안군 읍지)의 영향을 받아 그 체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필사본이다. 1730년(영조 6) 반포되었으며, 현재 규장각도서에 있다. 2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채색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제1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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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본관은 여양(驪陽). 자는 양초(養初). 청백리 진유(陳猷)의 증손이며, 백곡(栢谷) 진극경(陳克敬)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힘써 배우는 데 뜻을 두었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자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약으로 드렸으나 홀연히 돌아가시자 3년상을 치르면서 돌을 스스로 날라다가 무덤가에 화성(火城)을 쌓아, 불이 나도 옮겨 붙지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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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에 있는 책판. 이 책판의 저자 창주(滄洲) 하징(河澄)[1563~1624]은 정인홍의 문인으로 남명 조식의 제자들에게 인정을 받아 1606년에는 덕천서원의 원장으로 역임하였으며 남명의 작품을 간행하는 것을 주도하였으며 1620년에는 『진양지』를 최초로 편찬하였다. 창주집 책판은 1897년 12월에 진주의 오방제에서 목활자로 간행되었던『창주선생유사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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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지역의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며 정신 수양의 장소로 활동되었던 건축물인 누각과 정자. 일반적으로‘누정’은 사방을 멀리 넓게 볼 수 있도록 다락 구조로 높게 지어진 누각(樓閣)과 경관이 수려하고 사방이 터진 곳에 지어진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말로 자연 속에서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며 정신 수양의 장소로 활용되었던 건축물이 대부분이다. 누정은 경관이 좋은 산이나 대(臺), 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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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향안과 연계안. 연계재에는 향안 7책과 연계안 등이 보관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사족들은 향촌사회에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해 유향소(留鄕所)와 향회(鄕會)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수령의 자문에 응하거나 견제하고 향리들을 통제했다. 향안은 이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인물들의 명단이다. 그리고 연계안이란 소과인 사마시에 합격한 인물뿐만 아니라 대과인 문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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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진주목에서 편찬한 관찬 읍지. 진주지역의 역사, 지리, 풍토는 물론, 인물, 사건 등 모든 문화현상이 서술되어 있는 문헌으로 세 종류가 전해지고 있다. 현재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1832년(순조 32)의 임진본, 1871년(고종 8)의 신미본, 1895년(고종 32)의 을미본이 있으며, 이 중 임진본은 1991년 진주문화원에서 번역본으로 발간한 바 있다. 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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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를 대표하는 명승지. 진주성(晋州城)은 남성동과 본성동에 위치하며, 촉석성(矗石城) 혹은 진양성(晋陽城)으로도 불린다. 조선시대 진주성의 내성과 그 주변 지역 176,804㎡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촉석루(矗石樓)는 남강 가 돌벼랑 위에 세워진 우뚝한 누각으로, 남강 가 뾰족뾰족한 돌의 모양을 따서‘촉석루’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진주성의 남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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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17세기 초에 이루어진 진주의 사찬(私撰) 지리지. 지리지는 수록된 공간 범위에 따라 전국지인 여지(輿誌)와 지방지인 읍지(邑誌)로 나눌 수 있다. 또 지리지를 편찬한 주체에 따라 국가기관에서 만든 관찬(官撰) 지리지와 개인이 편찬한 사찬 지리지로 나누어진다. 전국 단위의 지리지로는 『동국여지승람』이 대표적이다. 조선 중기 이후 활발하게 편찬된 읍지는 전국 지리지인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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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이후 확립된 군현제도에 의하여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수령이 주재하는 치소가 있는 진주의 도시적 구역. 읍치(邑治)란 고려시대 이후 확립된 군현제도에 의하여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수령이 주재하는 치소(治所)가 있는 도시적 구역으로, 흔히‘읍(邑)’혹은‘읍내(邑內)’라고 부르는 곳이다. 『삼국사기』지리지(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양지(晋陽誌)』 등에 기록된 건치연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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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녀(妓女)들을 중심으로 하여 노래와 춤을 관장하던 기관인 진주교방(晋州敎坊)을 중심으로 형성된 예술. 진주의 교방예술은 진주교방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교방은 고려·조선시대 기녀들을 중심으로 하여 노래와 춤을 관장하던 기관이다. 교방청(敎坊廳)은 본래 중국 당나라 때 궁중 내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관기들과 악공들에게 가무악(歌舞樂)을 가르쳤다. 이러한 중국 교방의 전통은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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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개와 풍류를 지닌 진주 기생들의 생활 모습과 그로 인해 형성된 문화상. 진주의 논개(論介), 평양의 계월향(桂月香)으로 인해 ‘남 진주, 북 평양’란 말이 회자될 정도로 진주의 풍류와 멋은 그 명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조선 기녀하면 “일강계(一江界), 이평양(二平壤), 삼진주(三晋州)”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다. 1910년 1월 7일자 『경남일보』에 위암 장지연(張志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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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의 농업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물을 공급하는 시설. 조선시대에는 덕천강 유역에서 수전농업(水田農業)이 크게 발달하였다. 적어도 덕천강 유역의 농업지대는 진주지방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을 것이다. 그래서 진주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역사적 사건과 활동을 해석하는 데 덕천강 유역의 수전농업에 대한 연구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조선 초기에 남명 조식(曺植)이 덕천강 상류 덕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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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을 대표하는 진주성 촉석루, 남강 의암, 뒤벼리, 새벼리, 망진산 봉수대, 비봉산의 봄, 월아산 해돋이, 진양호 노을 등 여덟 곳의 비경. 진주는 예로부터 산과 들과 강을 끼고 있는 천혜의 고을이다. 조선시대 대표적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형승조(形勝條)」에는, 고려 명종 때의 문인 이인로(李仁老)[1152~1220]가 지은『파한집(破閑潗)』의 내용을 인용하여 “진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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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중북부에 위치한 면(面). 집현면(集賢面)은 지역 내에 있는 집현산(集賢山)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집현산(集賢山)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진주목읍지(晋州牧邑誌)』, 『진양지(晋陽誌)』의 산천(山川)란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전기까지는 진주목(晋州牧) 북면(北面)에 속해 동물곡리(冬勿谷里), 모태곡리(毛台谷里), 정곡리(井谷里), 신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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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명석면·미천면과 산청군 신안면·생비량면에 걸쳐 있는 산. 『진양지』에는 진주의 산으로 소개되어 있고, 지금도 집현산은 진주의 산으로 알려져 있다. 주봉은 산청군 신안면에 있다. 일설에 의하면 산신령이 거처하는 산이라 해도 7평이면 족하다고 하여 칠평산(七坪山)이라고도 한다. 역사적으로는 동학혁명과 임진왜란의 아픔을 간직한 산이기도 하다. 집현산의 식생은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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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어머니가 병이 들자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였다. 병든 어머니의 몸을 씻기고, 어머니의 쾌유를 위해 정성을 다해 하늘에 빌었다. 끝내 어머니가 돌아가자 크게 애통해 하였고, 예를 다해 장사를 지냈으며, 여묘에서 미음을 먹는 등 정성을 다했다. 진주 설매리(雪梅里)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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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노비인 채학의 아내였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1597년 정유재란 중에 절개를 지키다 죽었고, 인조 대에 이 일이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진주 영선리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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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의 옛 지명 진주는 가야 지역으로 거열성(居列城)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문무왕 3년(663) 2월에 거열성을 공취하여 거열주(居列州)라고 하였다. 신문왕 5년(685) 봄에 처음으로 9주를 정비하면서 거열주를 높여 청주(菁州)라 하고 대아찬 복세(福世)로 하여금 청주총관을 삼았다. 「삼국사기지리지」와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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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수군(水軍) 최귀석(崔貴石)의 딸이다. 나이 20여 살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하고 있더니 정유재란 때인 1597년에 우산(牛山)에서 화를 피하다가 적이 와서 핍박하고자 하므로 소리를 질러 크게 꾸짖고 절개를 온전히 하고서 죽었다. 진주 방방리(芳房里)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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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화순. 자는 적원(積元). 아버지는 병조좌랑을 지낸 최세준(崔世俊)이고, 어머니는 평해손씨(平海孫氏)로 현감을 지낸 손준(孫濬)의 딸이다.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의 아우이다. 부인은 정몽상(鄭夢祥)의 딸이다. 1575년(선조 8) 한양에서 형 수우당 최영경과 함께 선대의 토지가 있는 진주로 와서 도동에서 한집에 같이 살면서 섬기기를 부모같이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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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화순.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 아버지는 병조좌랑을 지낸 최세준(崔世俊)이고, 어머니는 평해손씨(平海孫氏)로 현감을 지낸 손준(孫濬)의 딸이다. 1529년(중종 24) 태어나 남명 조식(曺植)의 문인으로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과거에 실패하고 1572년(선조 5) 경주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후에도 조정으로부터 수령·도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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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사비(私婢)로, 사노(私奴)인 개동(介同)의 부인이다. 남편이 죽은 뒤에 다른 사람이 정조를 뺏으려 하였으나, 굳게 지켰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는 사죽리(沙竹里)에 살았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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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신하. 충신은 전통시대의 사상을 포괄하여 내려오는 용어이지만, 나라에 충성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할 수 없는 기본적 덕목이다. 이러한 충성심을 발휘하여 오늘날까지 후세의 칭송을 받고 있는 충신들은 그 마음이 항상 나라와 임금, 그리고 겨레를 위하는 일념에 차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때문에 개인의 영달이나 어느 한 집단의 권력 쟁취를 위하여 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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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아버지는 병조판서를 지낸 하승해(河承海)이며 어머니는 보성선씨 전객령(典客令) 선진기(宣眞起)의 딸이다. 조선 초에 병마도절제사를 지낸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이 형이다. 진주 주위 고을 수령을 지내며 형 하경복을 대신하여 모친 봉양에 정성을 다하여 효행의 명성이 높았다. 당시 하경복은 나라의 북경 수비를 맡아 15년간이나 국방과 영토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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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수록되어 있다.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에 출생하여 조선 건국 후인 1402년(태종 2) 무과에 급제한 후 상호군을 지냈다. 1410년에는 무과중시에 다시 급제하여 첨지총제로서 함경도 경원과 경성의 군사 요새지를 수비했으며, 세종 때에도 경기도 및 경상도의 병마절제사를 지냈다. 1433년(세종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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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994년(성종 13)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고, 1009년(목종 12) 중랑장(中郞將)이 되었다. 목종이 병들어 자리에 눕자 친종장군(親從將軍) 유방(庾方), 중랑장 탁사정(卓思政) 등과 함께 목종이 거처하는 궁궐 주변을 지켰으며, 얼마 후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郞中)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동서계(東西界)에 있을 때 임의로 군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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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희량(希亮). 진주 신당리에 살았다. 천성이 양순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행실이 돈독하여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하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다고 한다. 일찍부터 글재주로 이름이 있었고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은 하지 못하여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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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선재(善哉). 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郞) 하숙(河淑)이고, 어머니는 함종어씨(咸從魚氏)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의 딸이다. 부인은 진주강씨 강열의 딸이며, 사간(司諫) 하진보(河晉寶)의 아우이다. 1563년(명종 18)에 출생하여 진주 단지동에 살았다. 1573년(선조 6) 생원시에 합격했다. 천성이 순진하고 효우(孝友)가 돈독하였으며, 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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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본관은 진주. 조선 중종 때의 문신 강응태(姜應台)의 손녀이며, 사직(司直)을 지낸 강렬(姜冽)의 딸이다. 남편은 하국보(河國寶)이다. 평소에 부도(婦道)를 잘 지켰으며,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에 왜적을 만나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다. 진주 단지동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그 열행이 기록되어 있다. 뒤에 조정에서 절부의 정문(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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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녀·열녀.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하득곤(河得鯤)의 딸 하씨의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어려서 아버지가 병이 들어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를 하였으나 상태가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정려(旌閭)되지는 않았다. 진주 운곡(雲谷)에 살았다. 진주는 예향(禮鄕)으로써 많은 지조있는 선비들을 배출했는데 그에 못지않게 효자와 효녀도 많이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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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혼원(混源). 현감을 지낸 하형(河瑩)의 손자로, 아버지는 생원 하희서(河希瑞)이며 어머니는 배천조씨로 부사를 지낸 조상(趙瑺)의 딸이다. 부인은 함안조씨로 참봉 조정수(趙廷竪)의 딸이다. 1537년(중종 32)에 출생하였으며 진주 수곡리에 살았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그러나 하면의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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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태이(太易), 호는 송정(松亭). 고려 명신 하공진(河拱辰)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하면(河沔)이며 어머니는 함안조씨 조정견(趙庭堅)의 딸이다. 부인은 파평윤씨 윤언례(尹彦禮)의 딸과 밀성손씨 손천뢰(孫天賚)의 딸이다. 1553년(명종 8)에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히 전수받은 종숙 각재(覺齋) 하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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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晋州). 하경복(河敬復)의 손자. 성종 때 사람으로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참판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성품이 청간(淸簡)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시호는 경절(敬節)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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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부. 본관은 진주(晋州). 사인(士人) 하약(河瀹)의 부인이다. 일찍 남편을 잃고 평생토록 머리에 기름을 바르지 않았다. 집안이 가난하여 품팔이를 하였으나 제사에는 음식을 풍성히 하였다.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다가,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풍성히 하였다. 또한 염습과 의복을 모두 스스로 지었다. 진주 신당리(新塘里)에 살았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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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따르면 하옥동은 향리(鄕吏)로, 성품이 본래 정성스럽고 부모를 정성을 다해 모시는 등 효성이 남달랐다. 부모가 돌아간 뒤에는 기름진 음식을 피하고 결국 생을 마쳤다고 한다. 진주 주내(州內)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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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 자는 평지(平之)이다. 진주 사죽에 살았다. 1514년(중종 9) 무과에 급제한 후 통훈대부와 사천현감, 여산군수, 안주목사를 지냈다.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으며, 나라의 재목으로서 장차 크게 쓰일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안주에 있을 때 병을 얻어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20년 동안 휴양하다가 별세하였다. 어관포가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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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미재(美哉). 안주목사를 지낸 하우치(河禹治)의 손자이다. 진주 단지동에 살았다.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한 후 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를 역임했고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진평군에 책봉됐다. 천성이 자상하고 형제간에 화목하였다. 장례와 제례는 한결같이 가례를 따랐으며, 몸가짐에 한 점 흐트러짐 없고 고을에서 처신함에 성신을 다하니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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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고려 말 공민왕 때 평안도 숙천군 수령으로 있으면서 원나라 군관이 들어와 번잡하게 굴었으나 접대에 소홀함이 없었고, 정사를 함에 인의로써 근본을 삼아 형벌을 가볍게 하니 주민들의 칭송이 높았다. 후에 벼슬이 순흥부사에 이르렀다. 『진양지(晋陽誌)』권3「임관조(任官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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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찬성사로 치사(致仕)하고 진주군(晋州君)에 봉해진 하즙(河楫)의 아들이다. 벼슬에 나가 여러 지방에서 백성들을 돌보았으며, ‘잘못된 것을 알고서 그릇 판단한다면 하늘이 벌을 내릴 것이다.’라는 글을 써서 걸어놓고 일을 보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별세로 3년 동안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있었을 때 우왕이 ‘효를 옮겨 충으로서 삼고 그 애통함을 억제하고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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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1344년(충혜왕 복위 5) 과거에 급제한 후 1363년(공민왕 12) 전공정랑(典工正郞)으로 있으면서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1등공신에 올랐다. 1375년(우왕 1) 전라도원수 겸 도안무사에 있으면서 임의로 정원 외의 연호군(煙戶軍)과 별민군(別民軍)을 두었다하여 파면 당하였다. 이때 후임으로 온 원수 유영(柳瑩)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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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득제(得濟). 호는 송헌(松軒), 시호는 원정(元正).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진천부원군(晉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관직은 찬성(贊成)까지 올랐다. 일찍이 정치도감(整治都監)의 관원으로 있을 때 황후의 동생인 기삼만(奇三萬)을 장살하였다. 후에 강회백(姜淮伯)이 그의 초상화에 대하여 평하기를 “도량이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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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자평(子平), 호는 창주(滄州)이다. 진주 내당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균생원인 하위보(河魏寶)이고 어머니는 참의 이윤(李綸)의 딸이다. 숙부 하국보(河國寶)에게 입양되었다. 진주 단지동에 살았다. 기질이 순후하고 지조가 독실하여 자기를 다스리기를 매우 엄하게 하였으며 독서에 충실하여 어려운 곳은 반드시 질의와 논란으로 해결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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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덕재(德哉), 호는 영모정(永慕亭). 하숙(河淑)의 아들이다. 진주 단지동에 살았다. 1555년(명종 1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거쳐 1599년 주서가 되었다. 이듬해 세자시강원 사서가 되고 정언, 병조정랑, 지평, 예조정랑, 헌납 등을 역임했다. 1567년 선산부사가 되었고, 1573년(선조 6) 장령이 되었다. 그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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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자는해숙(解叔)이다. 진주 서신대에 살았다. 원래 남명을 보고 『근사록』을 배웠다. 이후 수우당 최영경(崔永慶)의 문하에 들어갔다. 도량이 컸고 외화내강(外和內剛)하여 최영경이 중히 여겼다. 부모를 섬김에 있어 정성을 다하여 조금이라도 감히 소홀함이 없었다. 사림(士林)의 풍도를 잃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불행히도 일찍 죽어 애석해 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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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굉지(浤之). 고려 명신 하공진(河拱辰)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운수당(雲水堂) 하윤(河潤)이며 어머니는 일선김씨(一善金氏)로 대사헌을 지낸 송파(松坡) 김지경(金之慶)의 딸이다. 부인은 남양홍씨로 현감을 지낸 홍억령(洪億齡)의 딸이다. 1469년(예종 1)에 출생하여 1496년(연산군 2)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참봉을 지냈다. 당시 연산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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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양지(洋之). 아버지는 운수당(雲水堂) 하윤(河潤)이며 어머니는 일선김씨(一善金氏)로 대사헌을 지낸 송파(松坡) 김지경(金之慶)의 딸이다. 부인은 전주이씨로 이정귀(李正貴)의 딸이다. 1472년(성종 3) 출생하여 1496년(연산군 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천성이 지극히 순하여 어기는 일이 없어 사림의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진주 백곡에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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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 자는 여해(汝海), 시호는 강장(剛莊). 할아버지는 증 병조판서 하승해(河承海)이고, 아버지는 좌찬성을 지낸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이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정씨(鄭氏)이다. 부인은 순흥안씨 순흥군의 딸과 함양박씨 박한의 딸이다. 1434년 회령진(會寧鎭) 절제사에 제수되었고, 동년 12월 영북진(寧北鎭) 절제사로 전임되었다.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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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벼슬이 사직(司直)에 이르렀는데, 90세가 된 아버지가 중한 병이 들자 대변을 맛보고, 종기를 입으로 빠는 등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였다. 아버지의 사후에는 6년 동안 상을 하였다. 『진양지』권3「인물조」에 이름이 올라 있다. 또한 하현부의 기사는 『동국여지승람』「진주목」효자조와 대동운부군옥에도 보이는데 진양하씨로서 효행이 지극한 선비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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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자기(子幾), 호는 단지(丹池). 아버지는 생원 하위보(河魏寶)이다. 1583년(선조 16) 출생하여 1606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세상이 어지러우므로 과거시험을 접고 초야에 묻혀 소요하면서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등과 교유하였다. 사람됨이 자상하고 얼굴과 기상이 단아하며 효우가 천성에서 나와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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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신백(愼伯). 한여철(韓汝哲)의 아들이다. 1590년(선조 23)에 생원에 합격하였다. 집에서는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었으며 주변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도 돈독하였다. 그의 나이 약관(弱冠, 스무 살)이 못되어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아우 한응(韓膺)을 가르치는데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우에게 항상 ‘네가 성인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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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신중(愼仲). 한여철(韓汝哲)의 아들이며 한계(韓誡)의 아우이다. 친구를 접대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신의로 하였고, 그 주장이나 의견이 항상 반듯하여 그 또래의 친구들이 항상 듬직하게 여기며 어려워하였다. 형 한계(韓誡)와 더불어 형제가 모두 사람에게 간언(間言, 이간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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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한씨는 정조가 있어 평소에 말하기를 ‘여자로서 불행히 변을 만난다면 죽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위험에 처하자 정절을 지키다가 죽었다. 선조 대에 이 일이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진주 정수리(丁樹里)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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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임진왜란 이후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왜적들에게 정절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절개를 온전히 하고 죽었다고 한다. 정려(旌閭)되지는 못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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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녀. 허진(許眞)의 부인이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가 적에게 해를 당하자 아버지와 더불어 같이 죽었다. 조이[召史]는 양반이 아닌 계층의 부인을 일컫는 말이다. 선조 때 조정에 알려져서 마을에 정문(旌門)을 내려주었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그 효행이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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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극진히 잘 섬기는 아들. 효자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효녀(孝女)가 있지만, 전통적인 가족제도 하에서는 부모와 아들의 관계가 우선적이었으므로 ‘효자’라는 용어가 ‘효도를 하는 자식’의 개념을 포괄할 수 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지배한 전통적인 규범으로서의 효 또는 효도는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정성껏 모시는 것뿐만 아니라 사망한 뒤에도 극진히 제사를 모시는 일 등을 포함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