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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전해오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선비정신에 관한 설화. 남명 조식 설화는 1622년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이 완성한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처음 실렸으며, 전통문화연구회가 2001년에 편찬한 『어우야담』에 국역하여 다시 수록하였다. 남명 조식은 두류산(현 지리산)의 산천재(山天齋)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명망이 높았고, 이에 여러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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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井村면)에 전해오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외도(外道) 이야기. 1980년 8월 11일 류종목, 빈재황이 경상남도 진양군 정촌면 화개리 모심마을에서 채록하였으며,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8-3에 수록되었다. 제보자는 강기중(남, 87세)이다. 진주 덕산(德山)에 살던 조식이 서울로 유람을 갔다. 한 오십 리를 걸어가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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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에 전해지는 똑똑한 며느리에 얽힌 문자 재담. 1980년 8월 5일 정상박, 성재옥, 김현수가 경상남도 진양군 명석면 신기리 새마을에서 채록하였으며,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8-4에 수록되었다. 구술자는 강재성(남, 66세)이다. 조선시대 중엽 서울에 한 정승이 살았는데 가세(家勢)가 기울어 인망가폐(人亡家廢)가 되었다.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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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가정리에 있는 숲 조선 전기부터 숲이 아름답고 자연 절경이 뛰어나 여름이면 각처에서 휴식처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으로 유명한 동산이다. 가정숲은 가정리 마을 앞에 있으며 큰 숲이 아름답다고 하여 가정(佳亭)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가정리 가정마을회관 뒤편에 위치한다. 진주에서 의령 쪽으로 가다가 대곡면사무소에서 대곡중학교, 대곡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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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강결은 성품이 효성스러워 노모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노모의 나이 92세 때 강결이 노모에게 꿩고기를 대접하려고 마음 먹고 목욕재계를 한 후 하늘에 빌었는데, 이때 갑자기 꿩이 부엌으로 날아왔다고 한다. 또한 이전에 마을에 역병이 돌아 어머니를 모시고 산중으로 피신 갔다가 온 일이 있었는데, 호랑이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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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우약(友若), 호는 묵촌(黙村). 조선 초기의 문신인 강숙경(姜叔卿)[1428~1481]의 후손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부모가 병들었을 때는 그 똥을 맛보았으며 부모의 치유를 위해 하늘에 기도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상복을 벗지 않고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3년 동안 하였다. 아우인 강달지(姜達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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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남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강대수(姜大遂)의 선정비. 1642년(인조 20)~1643년 동안 진주목사를 지낸 강대수의 덕행과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남동에 위치한 은열사(殷烈祠) 내에 위치한다. 귀부 위에 높이 205㎝, 너비 73㎝, 두께 15㎝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머릿돌은 사각형으로 앞면에는 여의주를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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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가 종기를 앓았는데 의원이 두꺼비를 달인 것이 좋다고 하였다. 계절이 한겨울이라서 두꺼비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갖은 노력을 다해 두꺼비를 구해 드리니, 아버지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그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행적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표(旌表)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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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자.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병을 고치고자 하였다. 여덟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70살에 추상(追喪)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그 행적이 기록되었다. 효종 때에 정려(旌閭)를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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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내경(乃敬), 호는 일소헌(一笑軒).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1493~1552]의 후손이다. 강석무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극진히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매우 슬퍼하며 삼년상을 치렀다. 나라의 변고가 있은 뒤로는 스스로 문을 닫아걸고 원통해 하였다. 주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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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주려(周呂), 호는 매호(梅湖). 아버지는 설림(雪林) 강성조(姜聖祚)이다. 어려서부터 어버이께 효도하고 아우 강주행(姜珠杏)과 강우송(姜玗松)에게 우애가 있었다. 아버지가 병이 걸리자 아우인 강주행(姜珠杏)과 더불어 여러 달 동안 시중을 들었는데 밤에도 눈을 붙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매우 슬퍼하였다. 천성이 단아하고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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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성오(成五). 아버지는 장령(掌令)을 지낸 강성희(姜聖喜)이다. 아버지 강성희가 병으로 누워 있을 때 형인 강영호(姜泳鎬)와 더불어 밤낮으로 병 수발을 하였다. 한 모금의 물과 한 번의 소변이라도 공손히 시중하여 아버지를 매우 편안하게 하였다고 한다. 상을 당해서는 몹시 슬퍼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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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목사 강천(姜闡)의 후예로, 아우는 강척(姜惕)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아우 강척과 더불어 문행이 있었다. 회림정(徊臨亭)을 세우고 아우 강척과 함께 학문에 진력하여 당시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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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군보(君保). 아버지는 지평(持平: 정5품 문신)을 지낸 강전(姜詮)이고, 할아버지는 강석정(姜碩貞)이다. 효성스럽고 형제 간에 우애가 있었다. 형인 진사(進士) 강여평(姜汝平)이 중한 병이 들자 친히 약을 달이고 백방으로 병구완하여 병이 낫게 하였다. 형이 죽자 1년 동안 묘를 지키며 시묘살이를 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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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강엄(姜曮)이고, 아버지는 사인(士人) 유훤(柳煊)이다. 어려서부터 행실이 단정하였다. 남편 강엄이 병에 걸려 죽자, 한걸음에 달려가 슬퍼하며 말하기를 “곧 남편의 뒤를 따를 것이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세 달만 지나면 서로 만날 것입니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 유씨의 배 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 달 후 아이가 태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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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사 강여평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남편인 강여평이 중병이 들어 죽은 후에 3년 동안 죽만 마시고, 평생 소복을 입었다고 한다. 진주 평거리(平居里)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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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주 소촌역의 향리였던 강용(姜龍)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에는 ‘제조이[諸召史]’로 기록되어 있는데, 제조이는 ‘제씨 성을 가진 여성’을 뜻하는 말이다. 조이[召史]는 양반이 아닌 평민 출신의 과부를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남편이 죽자 장사에 예를 극진히 하였고, 옷을 모두 고쳐 상복으로 만들어 입었으며, 아침저녁으로 제물을 올리고 3년 동안 고기를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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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의숙(宜叔). 아버지는 생원(生員) 강호(姜灝)이고, 할아버지는 훈도(訓導) 강세련(姜世連)이다. 맑은 얼음과 같은 지조와 가을 하늘과도 같은 기상을 지녔다고 한다. 악한 것을 미워하여 악취처럼 여기고, 옳은 것이 아니면 겨자 한 알도 취하지 않았다. 일찍 세상을 떠나니 많은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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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찬지(贊智).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다음과 같이 강의회의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워서 부모를 섬길 때 뜻을 받들고 몸을 편안하게 하였다. 부모가 병드니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고 똥을 맛보아 병세를 살폈으며, 허벅지를 잘라 피를 내어 약에 섞기도 하였다. 고종(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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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사인(士人) 강민효(姜敏孝)의 아들이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실려 있다. 아버지가 중병이 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바치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진주 수곡에 살았으며,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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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창원황씨는 남편이 병이 들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게 하여 3일 동안 목숨을 연명시켰으나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곧 남편을 따라 자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가솔들을 부탁한다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자녀의 혼인을 끝내고는 집안 식구들에게 이별을 고한 뒤 자진하여 남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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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부. 부장(部將) 강추국(姜秋國)의 딸이다. 효행이 뛰어나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바쳐 병이 낫게 하였다고 한다. 진주 금산리(琴山里)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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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극명(極明), 호는 우재(愚齋).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관인인 강회백(姜淮伯)[1357~1402]의 후손이다.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바치고, 변을 맛보아 그 병든 정도를 헤아렸다. 어머니가 중풍을 앓아 수족을 쓸 수가 없을 때는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곁에서 숟가락을 들어 식사 시중을 들었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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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중용(仲容)이다. 9살의 나이에 아버지가 싸움에서 죽으니 울면서 뛰다가 갑자기 기절하였으며, 집상(執喪)을 성인과 같이 하였다. 12살에 어머니가 병이 들자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한 번은 고기를 낚아서 밤에 돌아오는데 호랑이를 만났으나, 호랑이가 스스로 길을 피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기력이 많이 약해진 어머니는 ‘내가 죽으면 반드시 옥황상제가 세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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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字)는 찬익(贊翼)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몸소 품팔이를 하여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부모를 공양하였다. 부모가 병이 나면 자신도 먹지 않았다. 아버지의 묘가 집에서 멀었는데도 날마다 가서 살폈고,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묘소로 달려가서 상복을 벗어 봉분을 덮어주기도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효자라고 일컬었으며,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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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중촌리 반야동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강혼의 묘. 강혼(姜渾)[1464~1519]은 조선 중기의 이름난 문장가로 김일손(金馹孫)과 더불어 당대에 이름을 날렸다.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였고, 시로써 연산군에게 아부하여 사림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중촌리 반야동의 진주 강씨 선영에 위치해 있다. 배위(配位) 정경부인 박씨 묘와 더불어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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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남편 강휘준은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본래의 생모를 후가(後家)의 낭실(廊室)에 모시고 양정(兩庭)을 효성으로 봉양하였는데, 재령이씨도 이에 순응하여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다. 남편 강휘준이 본래의 생모를 낭실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큰비가 오자 하천물이 갑자기 들이닥쳐 집이 떠내려가고 모자가 함께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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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경충당의 기둥과 벽에 장식으로 붙어 있는 한시. 6언 8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은이는 알려져 있지 않다. 景忠堂 柱聯(경충당 주련) 徃事龍蛇變亂(왕사용사변란) 玆州湖嶺要衝(자주호령요충) 將軍殞首全城(장군운수전성) 節士挺身赴水(절사정신부수) 輕重一於以義(경중일어이의) 敗成非所論人(패성비소논인) 至今氣壯山河(지금기장산하) 自昔醴尊香幣(자석예존향폐) 지난 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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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효자 김걸의 동생이다. 내노비로서 진주 명석리에 살았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항상 옆에 있었고 조금도 떠나지 않았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형이 이미 죽은 상황에서 병이 중한 어머니가 자신이 출타한 사이 돌아가시게 되면 종신토록 한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잠시도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제사를 올리는데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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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주 나동에 살았다. 성품이 착하고 효성스러워, 시집간 후로는 시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시어머니가 병에 걸려 3년을 앓았는데 산이나 하늘에 정성으로 빌고, 시어머니의 대변을 맛보아 증상을 체험하는 등 정성을 다해 간병하였다. 이 일이 알려져 모성공회(慕聖公會) 및 군리로부터 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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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및 의병장인 고종후(高從厚)의 묘. 고종후[1554~1593]의 호는 준봉(準峯), 본관은 장흥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1593년 진주성전투에서 활약하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순절했을 당시 시신은 이미 유실되어 묘(墓)가 없었다. 지금 남아 있는 무덤은 1619년(광해군 11)에 윤허를 받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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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내동면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조선시대의 수리시설. 『진주목읍지(晋州牧邑誌)』「제언(堤堰)조」에 고택제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3년마다 호구조사가 있었고, 『진주목읍지』도 그러한 제도에 근거 하여 작성되었는데 현재 1832년(순조 32)의 『진주목읍지』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고, 이를 근거로 추정할 때 적어도 1832년 이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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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담리에 있는 정자 조선 중기의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 700명을 이끌고 공을 세운 관란(觀灡) 허국주(許國柱)가 난이 끝난 후 청담리 염창나루 가에 이 건물을 짓고 은거하였다. 『속진양지』에 의하면, 허국주는 일찍 무과에 급제하여 우후(虞侯)가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을 닥치는 대로 쳐부수었다. 1812년(순조 12) 고장의 선비들이 임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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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에 있는 성황신을 모신 신당. 관지리는 진양하씨(晋陽河氏)의 집성촌으로, 옷밭·섬말·관음정을 포괄한다. 관지리 서낭당은 북당·서당·남당·동당의 사방에 있었으나 동당이 없어지고, 일제강점기에 와서 서당과 남당이 없어져 현재는 북당만이 존재한다. 관지리마을 북쪽 숲 뒤에 위치하고 있으며 별도의 당집은 없다. 제례는 음력 12월 말 개소리나 닭소리가 없는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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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상미리에 있는 골짜기. 조선 초기 금광을 개발하여 금을 채취하던 골짜기이다. 금광(金鑛)이 있는 골짜기란 뜻에서 광석골이라 이름하였다. 100m가 좀 넘는 굴이 있는데, 지금은 금을 캐지는 않는다. 주위에서 소량의 사금(砂金)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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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능성(綾城)사람 구사서(具仕書)이고, 아버지는 김희수(金希洙)이다. 진주 가정에 살았다. 김녕김씨의 남편 구사서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김씨부인은 남편을 따라 죽기를 결심했으나 늙은 시부모가 마음에 걸려 자진하지는 못하고, 헝클어진 머리와 때가 낀 얼굴로 미망인 생활을 자처하였다. 세 아이가 장성함에 따라 유학을 시키는 등 집안일을 정성껏 돌보았고,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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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능성인(綾城人) 구치조(具致祖)이고, 아버지는 왕기삼(王基三)이다. 진주 가정에 살았다. 개성왕씨는 천성이 착하고 효성스러워 시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집이 가난하여 품팔이와 길쌈으로 생활을 꾸려나가고, 시부모에게는 몸에 편한 물건이나 입에 맞는 음식을 올렸다. 시어머니가 중한 병에 걸려 수년이 되도록 더해가니 왕씨는 백 일 동안 산에 올라가 시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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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진주에서 조직된 영남 사림들의 친목단체. 섭리에 순응하고 이상적인 도학(道學)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사림파의 친목단체로 조직되었다. 지배층의 솔선수범과 근검절약을 신조로 삼았다. 1489년(성종 20), 진주목사 경임, 김해도호부사 이손(李蓀)[1439~1520], 창원도호부사 이영분(李永賁), 전 진주목 교수 김일손(金馹孫)[1464~1498], 조위(曺偉) 등을 비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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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중천리 중천마을에서 마을의 평안을 위하여 지내는 동제(洞祭). 조선 중기(약 450년 전)부터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중천리 중천마을에서는 주민들이 마을 입구에 있는 성황당나무(고목의 정자나무) 아래에 모여서 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화합, 미풍양속의 계승을 기원하였다. 행사는 음력 정월 보름날 행해지는데, 특히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사람이 참여하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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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갖지 못하는 집안에서 잉태를 위해 신령한 힘을 가진 대상물에 치성을 드리던 풍속. 아이를 얻기 위하여 치성을 드리는 일은 단순한 것이 아니어서 치성을 드리는 사람, 시간, 장소, 기간, 그리고 치성의 대상과 방법이 매우 다양하였고, 잉태를 한 뒤에도 딸을 아들로 바꾸는 전녀위남(轉女爲男) 등 다양한 주술이 행해져 왔다. 진주지역의 경우, 치성을 드리는 사람은 아기를 갖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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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노비 고음동의 형이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왜구를 만났을 때 그 어머니가 병이 깊어지자 등에 업고 피난하여 어머니를 온전히 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두 팔이 성치 못하자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수저를 들어서 먹게 하였다. 진귀한 음식이나 신선한 과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가지고 돌아와 어머니께 드렸다. 두 명의 아우와 함께 살았는데 우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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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진주 백곡(栢谷)에 살았던 인물로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올라 있다. 유학(幼學)이며 효자로 명성이 있었다. 성품이 크고 담대하였다. 어버이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바쳐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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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하촌리에 있는 원주원씨의 열행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열녀비(烈女碑). 열부(烈婦)인 원주원씨를 기리는 비로 그녀의 손자 김두연과 집안사람 김억조가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하촌리 가좌부락을 조금 벗어나 대곡면으로 가는 지방도 옆에 동향으로 있다. 사각의 받침돌 위에 높이 135㎝, 폭 46㎝, 두께 16㎝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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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강씨는 남편 김서룡이 병이 들어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두 되 남짓의 쌀을 가지고 가만히 산 속에 들어가 어느 무덤 속의 시체 곁에 두었다가 다음날 가지고 와서 미음을 써서 남편에게 봉양하기를 세 번 하였다. 미음이 효력이 없자, 이번에는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남편에게 구워 먹였다. 남편이 기력을 회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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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삭녕최씨는 성품이 효성스러워 시부모를 잘 섬겼다. 시부모가 병이 들어 오랫동안 자리에 누워 있자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였고, 울적함을 달래주기 위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등에 업고 즐겁게 해드리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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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강씨의 시어머니가 학질을 앓아 고통이 심하여 거의 실신할 지경에 처하자 강씨가 울면서 하늘에 빌고, 또한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약을 지어 올리는 등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였다. 강씨의 정성으로 병이 나은 시어머니는 천수를 누린 후 죽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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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개인에게 소속된 노비인 사노(私奴)이다. 부모와 형제에게 지극하여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부모들이 토지를 그 아우에게 모두 물려주었는데도, “나는 처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있으니 살아갈 수 있다”라고 하며 조금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노비가 재산을 소유했고, 여자도 상속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진주 시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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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김준원(金俊元)의 손자로 효성이 남달랐다. 16세가 되던 때, 아버지가 병이 들자 집 뒤쪽에 단을 쌓고 아버지의 쾌차를 위해 울면서 하늘에 빌기를 한 달이 넘도록 하였다. 어느 날 홀연한 기운이 돌면서 무지개와 같은 것이 단에서 나와 아버지가 누워있는 병상 쪽을 향해 뻗쳤다. 이후 아버지의 병은 곧 나았다고 한다. 그 효행이 나라에 알려져 정려되었으며 『진양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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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김승택(金昇澤)이고, 아버지는 강호운(姜浩運)이다. 진주 미천에 살았다. 진양강씨는 남편 김승택이 중한 병에 걸려 수개월간 자리에 누워있자, 지극 정성으로 간병을 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어느 날 가만히 방으로 들어가 약을 마시고 자진하니 집안 식구들이 서둘러 구하고자 하였으나 숨을 거두었다. 얼마 후 남편이 회복되어 쾌차하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감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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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광주노씨는 시아버지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약을 지어 올리는 등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였다. 또한 시어머니가 병이 들어 위독하자 밤낮으로 하늘에 쾌유를 빌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게 하는 등 병든 시부모를 정성껏 간병하였다. 이 일에 감복한 향리가 조정에 보고하여 고종 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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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 내에 위치한 김종일의 선정을 기리는 비. 1630년 진주판관을 지낸 노암(魯庵) 김종일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1630년 당년에 세웠다.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가진리 진주성 내 비석군에 위치하고 있다. 1973년에 진주성 내로 옮겨왔다. 높이 149㎝, 폭 78㎝, 두께 18㎝이며 정방형의 비신 위에 크고 섬세한 이수(螭首)를 이고 있다. 비의 제목은 ‘通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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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두문리에 있는 효적비. 유인 남원양씨가 시아버지에게 행한 효행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효행내용을 기록하여 두문마을에 세운 비를 말한다.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두문리 두문마을 산기슭에 위치한다. 비좌는 방형이고 비수는 한옥와가 형태의 가첨석인데, 방형의 받침돌 사방에 석주를 세워 대형의 비수를 받치고 있어서 마치 보호각의 역할을 겸하도록 하였다. 비문은 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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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태운(太運)으로, 학성(鶴城) 출신이다. 진주 상사리(上寺里)에 살았다. 천성이 매우 순하고 우직하여, 친척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이웃과도 화목하게 지냈다. 외족(外族)에 가난하고 의탁할 데가 없는 이들을 한집에 거느리며 키워서 남자는 장가를 보내주고, 여자는 시집 보내는 등 남을 돕는 데 힘썼다. 또한 예의범절이 발라 향리에서 모두 칭송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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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이나 가계사항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강조이[姜召史]’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남편은 보인(保人: 조선시대 군역을 지는 정군(正軍)에게 딸린 경제적 보조자)인 김축(金軸)이다. 남편이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주어 목숨을 구하였다. 진주 자매곡(自梅谷)에 살았다. 조이[召史]는 양반이 아닌 신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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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훈도(訓導)로 성품이 바르고 온화하면서도 절개가 있었다. 또한 예와 효를 행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비록 집이 가난하였으나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서 반드시 부모가 좋아하시는 맛있는 음식들을 갖추려고 노력하였다. 나이가 들어 어버이의 상(喪)을 당해 애통해 하였는데, 예(禮)를 갖추어 채소와 과일을 먹지 않고, 3년 상을 치르는 동안 죽만으로 연명하였다. 이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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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김녕김씨 김형백(金炯佰)이고, 아버지는 하계윤(河啓潤)이다. 행실이 정숙하여 시부모와 남편을 정성을 다해 모셨다. 시할머니가 오랜 기간 병상에 누워있게 되자, 밤낮으로 탕약을 지어 올리는 등 간병하는 데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산적이 깊은 밤에 나타나 남편을 포박하여 데리고 가려 하자, 진양하씨가 따라가서 ‘나의 남편이 무슨 죄가 있기에 죽이려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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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선무랑(宣武郞, 조선시대 종6품의 문관 품계) 남정소(南廷召)의 부인이다. 진주 원당촌에 살았다. 지조가 뛰어나 마을에는 정문(旌門)을 내려주었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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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자.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진주 어느 절의 노비로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어버이에게 바치는 효성만은 누구 못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늙은 어머니를 업고 떠돌아다니면서 걸식하여 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힘을 다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고, 담제(禫祭: 대상을 치른 다음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를 지낸 뒤 비로소 고기를 입에 넣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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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의 옛 지명. 동리 안에 붉은 연못이 있어 단지동(丹池洞)이라고 하였다. 단동(丹洞)이라는 이름은 ‘의를 숭상하는 마을’이라 하여 붙었다고 한다. 단목(丹牧)이라고도 하는데, 과거에 합격한 선조가 깃발을 앞세우고 마걸둥천 연못가에 내려보니, 저녁 노을 햇빛이 연못물 위에 붉게 비치고, 말이 거기서 물을 마시니, 여기서 붉을 단(丹)과 먹일 목(牧)을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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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대암리에 속했던 옛 지명. 나무 다리를 건너서 가야 했다 하여 다리골이라 불렀고, 이것이 달리골이 되었고 한다. 조선 전기에 달리동은 진주목 북면 정곡리(井谷里)에 속했다. 1897년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진주군 집현동면 달리촌(達理村)이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의해 달리동은 지내리와 대암리로 나누어 편입되었다. 현재의 진주시 집현면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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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진주성 동쪽지역으로, 옛 행정구역 또는 행정지명 중 하나. 조선 전기에는 자연촌락의 성장과 중앙집권화의 진행에 의해 중앙권력이 군현의 하부단위인 촌락에까지 개입하게 되면서 면리제라는 촌락운영체계가 형성되었다. 경국대전에 5호(戶)를 묶어 1통(統)으로, 5통을 묶어 1리(里)로 한다고 규정하고, 몇 개의 리를 묶어 면(面)으로 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읍치를 중심으로 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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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바깥 성벽에 위치했던 동쪽 누각. 동장대는 조선시대 진주성에 설치됐던 4개의 장대 중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동쪽 누각을 말한다. 지금의 중앙사거리와 중소기업은행 진주지점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장대는 진주성 외성벽의 신북문과 동문 사이에 위치해 있던 관계로 가장 치열한 접전 장소가 되었다. 임진왜란 중 제2차 진주성전투 때 왜군들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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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단련을 위하여 들었다 놓았다 하는 돌. 들돌은 옛날의 놀이도구 겸 운동기구로 1930년대까지 마을 공동마당에는 크기가 다른 단단한 둥근 돌 2개 정도를 준비해 두고, 마을 청소년들이 힘겨루기를 하는 데 이용하였다. 이 돌로 배 올리기, 어깨 넘기기, 던지기 등 시합을 하여 힘을 겨루었는데, 이처럼 드는 데 사용한 돌이라 하여 ‘들돌’이라 부르고 있다. 둥근 형태에 둘레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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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조선시대의 수리시설. 『진주목읍지(晋州牧邑誌)』「제언(堤堰)조」에 마삼제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3년마다 호구조사가 있었고 『진주목읍지』도 그러한 제도에 근거 하여 작성되었는데 현재 1832년의 『진주목읍지』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고, 이를 근거로 추정할 때 적어도 1832년 이전에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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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사노비(私奴婢)로 진주 백곡리에 살았다. 산골짜기에서 밭을 갈고 있는데 지나가는 중이 그를 욕보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막지는 목숨을 걸고 이에 저항하였다. 중이 낫을 당겨 목을 누르며 위협하였으나 욕을 하면서도 따르지 않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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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망경동 망진산에 있는 봉수. 『경상도지리지』(在州南七里許 南望泗川縣地城隍堂烽火 相距十八里五十九步 北望廣濟山烽火 相距二十五里二百八十步), 『세종실록지리지』(在州南 南准泗川城隍堂 北准廣濟山), 『여지도서』(在州南十里 南應泗川鞍峴 北報州廣濟 相距四十里)에 각기 기록되어 있다. 망진산봉수는 남쪽의 사천 안현산봉수(鞍峴山烽燧)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서 북쪽에 있는 진주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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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에 있는 재실. 진양하씨로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하천서(河天瑞)와 하경호(河慶灝) 부자의 재실이다. 하천서의 호는 망추(望楸), 하경호의 호는 읍추(泣楸)로, 하천서의 호를 본떠 망추정이라 하였다. 하천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군대를 훈련시키고 허물어진 진주성을 수축하고 못을 깊이 파서 장차를 대비하였다. 후에 임진왜란 때의 공이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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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효자인 사간(司諫) 모순(牟恂)의 후손이다.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성품이 바르고 충효로웠으며 온 힘을 다해 예를 행하였다. 부모가 함께 죽자 연복 6년을 하였다. 사람들이 그 효성과 예절에 탄복하고 흠앙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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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전해오는 문익점(文益漸)의 목화 시배(始培)에 관한 설화. 류종목, 빈재황이 1980년 8월 5일 수곡면(水谷面) 사곡리(士谷里) 식실부락에서 채록하였으며,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편찬한 『한국구비문학대계』8-3에 수록되었다. 제보자는 하성로[남, 당시 70세]이다. 문익점이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왔는데, 정식으로 수입하지 않고 요즘 말로 밀수했다.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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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갈곡리에 있는 문인석. 문인석은 묘 앞에 조성한 문신의 모습을 한 석상으로, 이 문인석이 있는 문산 갈천역 앞 안골 부근에는 조선시대의 분묘와 석물이 다수 위치하고 있어 다른 석물들과 함께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갈곡리에 있다.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으며, 높이 155㎝, 너비 48.5㎝, 두께 31.5㎝의 규격이다. 머리에는 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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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전기의 문신인 하륜(河崙)[1347~1416]이 태어난 곳. 하륜의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이다. 이방원(李芳遠)을 적극 지지하여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이 즉위하자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이 되었고,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이 되었다. 이후 영의정부사·좌정승·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사후 태종의 묘정(廟庭)에 봉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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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용아리에 있는 말의 무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지명으로, 이 곳 사람들은 ‘말매뜽’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김덕령(金德齡) 장군이 월아산에 목책성(木柵城)을 쌓고 방어할 때 장군의 말이 죽어서 묻은 말무덤에서 유래되었다. 금산면 용아리의 가는골[細谷] 저수지 위쪽 산기슭 소나무 숲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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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시조 손순(孫順)의 선계는 신라 6부 촌장의 한 사람인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이다. BC 57년 구례마가 다른 촌장들과 함께 박혁거세를 신라왕으로 추대하여 개국공신에 올랐고, 그 후 32년(유리왕 9)에 사성을 받아 손씨가 창성되었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흥덕왕 때 월성군에 봉해진 손순을 시조로 하였으며 손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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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녹권.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활약한 박세항의 공을 찬양하여 내린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으로, 선조 38년(1605) 도승지 신흠(申欽)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내렸다. 박세항은 현재 창렬사에 배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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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중종 조에 정려된 효자 박인(朴氤)의 손자이다. 진주 말동리(末洞里)에 살았다.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재산을 나눌 때 스스로 매우 적게 가지려고 하였고, 이후에도 형제 가운데 군색하고 모자라는 이가 있으면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주었다.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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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중종 조에 정려된 효자 박인(朴氤)의 손자이다. 언제나 『소학(小學)』 한 부를 가지고 다녔으며, 몸을 다스리는데 빈틈이 없었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는 죽만 먹었으며, 애통해하는 것이 낮밤을 가리지 않았다. 항상 관 옆에 있었으며 상복을 벗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올리매 친히 그릇을 씻고 음식을 들었다. 또한 사당의 의례와 법도를 분명히 하였다. 모든 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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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효자 박효근(朴孝根)의 둘째 아들이다. 심성이 비르고 효성이 깊었다. 어버이가 병이 들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려 노력하였으며, 그러던 중에 길에서 눈 속에 백화사(百花蛇)를 얻어 올렸더니 어버이의 병이 나을 수 있었다. 1885년(고종 22)에 정려되었다.『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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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효자리에 있는 광산김씨의 효행을 기리는 비. 광산김씨의 효행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박종래(朴宗來)가 주도하여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효자리로 들어가는 효자교 부근 진주~합천간 지방도 옆에 남향으로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에 높이 153㎝, 폭 55㎝, 두께 37㎝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비의 제목은 “효부광산김씨지려(孝婦光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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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가계나 활동사항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과 효행만이 기록되어 있다.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바치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진주 비라곡리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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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속명(俗名)은 하일천(河一千)으로 사인(士人) 하극충(河克忠)의 아들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백천사(百泉寺)에 살면서 해상(海上)의 고기잡이와 친하게 지내어 고기를 얻어서는 즉시 그 어머니에게로 돌아가서 드리는 등, 달고 맛있는 음식은 언제나 어머니에게 가져다주었다. 만년에는 정촌서재(鼎村書齋)에 거주하면서 어머니를 위하여 향도계(香徒契)에 들어 힘을 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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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소재한 봉남서원의 기둥과 벽에 장식으로 붙여진 한시. 자연적 환경이 수려한 곳에서 학문에 정진한다면 학식과 덕망이 훌륭한 사람이 배출될 것이 분명하니, 『시경』과 『예경』의 중요함과 수덕(修德)의 필요성을 노래한 것이다. 한시는 중재(重齋) 김황(金榥)이 지었다. 8언 8행으로 된 한시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봉산 굽이굽이 서리고 솟아 우러러 볼수록 더욱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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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황수장(黃壽長)의 아내로, 사비(私婢)였다. 스무 살에 남편을 잃었는데, 상복을 벗지 않고 매우 애통해 해서 몸이 상할 정도였다. 아버지가 불쌍히 여겨서 개가(改嫁) 시키려 하였지만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진주 청원리에 살았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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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진주목 진주성의 북쪽지역으로 옛 행정구역 또는 행정지명 중 하나. 조선 전기에는 자연촌락의 성장과 중앙집권화의 진행에 의해 중앙권력이 군현의 하부단위인 촌락에까지 개입하게 되면서 면리제라는 촌락운영체계가 형성되었다. 경국대전에 5호(戶)를 묶어 1통(統)으로, 5통을 묶어 1리(里)로 한다고 규정하고, 몇 개의 리를 묶어 면(面)으로 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읍치를 중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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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각 지방 군현의 촌락에 설치된 곡물 대여 기관. 사창은 중국에서 각 지방 행정단위인 ‘사(社)’에 창고를 세워 기근에 대비한 의창(義倉)과 남송의 주희(朱熹)가 실시한 사창법에 기원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제도들을 본받아 고구려 때는 진대법(賑貸法)을, 고려시대에는 의창·상평창 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조선시대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사창제도를 실시하였다. 사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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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천로를 시조로 하고 사간 복린을 입향조로 하는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임. 가암 최제묵, 매산 홍직필의 문인으로 예학에 밝았으며 문집을 남겼고, 아들 삼수헌 효숙은 고산 임헌회를 사사하였으며, 아들 긍재 최동민은 연재 송병선의 문인이고, 그의 아들 운암 최인희도 진사로 간재 전우의 문인이다. 고려 때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최천로가 시조이지만 중간이 실전되었고 후손 최복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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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진주의 행정구역 중 하나. 조선시대 진주성 서쪽지역으로, 현재 평거동, 대평면, 수곡면 지역과 하동군 화개면, 악양면, 적량면, 옥종면, 청암면, 횡천면 일부와 사천시 축동면, 산청군 시천면, 삼장면, 단성면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고려 태조 23년(940) 3월에 강주(康州)를 진주(晋州)로 개칭하면서 처음으로 지금의 진주라는 지명이 등장하게 된다. 이후 성종 2년(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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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운영기구. 서원의 기능과 역할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즉 공부하는 곳, 선현을 모신 곳, 향촌사회의 도서관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종교행사와 관련된 서원의 역할은 선현을 받들어 모시는 곳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 이르러 교육의 기능보다 사묘(祠廟)의 기능이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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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대축리에 있는 서씨의 입향조(入鄕祖)인 서이언의 묘. 서이언(徐而彦)[1702~?]은 조선 숙종~영조 연간에 걸쳐 살았던 인물로, 비문에 의하면 숙종 28년 임오년에 태어난 기록은 있으나 몰년 기록은 없다. 수직(壽職)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를 받은 달성서씨의 입향조이다. 묘소는 진주시 정촌면 대축리 향교부락에 있는 서씨 문중 재실인 숭모재(崇慕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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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부. 진양인 하경휴(河慶烋)의 딸로, 석정재(石楨載)의 아내이다. 『진양속지 증보』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아하고 효성스럽더니 17세에 시집가서는 효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남편을 예로써 섬겼다. 시아버지가 우연히 낫기 어려운 병을 얻어 4년간을 병석에 눕자 백방으로 좋은 약을 구하고자, 집 뒤 산에 우물을 파고 매일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빌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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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관청 건물. 원래 관찰사는 각도에 1명씩 임명했던 조선시대의 지방장관(종 2품)을 말하는데 관찰사를 다른 말로 ‘감사’라고도 불렀기 때문에 관찰사가 있는 관청을 ‘감영’이라고 했다. 경상도관찰사는 조선시대 내내 대구(달성) 등 경상북도에만 주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상남도에는 없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 경상도가 남북으로 나눠진 후 관찰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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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에 있는 조선 중기로 추측되는 고분.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 설매마을 뒷산에서 설상으로 뻗어 내려온 구릉 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1977년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에서 간행한 『문화유적총람중권 -경상남도-』에 설매리 마을 뒷산 대숲에 2기의 가야고분인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봉토분이 분포하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2006년 재조사가 실시되었다. 봉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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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성경철(成慶喆)이고, 아버지는 강기섭(姜岐燮)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강씨는 심성이 효성스러워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중한 병에 들어 자리에 눕자, 3년 동안 하늘에 빌어 마침내 신령스러운 효력을 얻었다. 나이 20여세 때 아들을 낳았는데, 홀로 된 시어머니 때문에 우는 소리도 내지 못하니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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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진주목사 성이성(成以性)의 선정을 기리는 비. 성이성은 본관은 창녕, 호는 계서(鷄西)이다. 인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진주목사로 있을 때 어사 민정중(閔鼎重)의 보고로 선정이 조정에 알려졌다. 후에 청백리로 뽑혔으며 사후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1657년(효종 8)부터 이듬해까지 진주목사를 지낸 성이성[1595~1664]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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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성치린(成致麟)이고, 아버지는 허란(許鑾)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김해허씨는 평소에 정조를 엄격히 지켰다. 남편의 장례 때 곡을 하면서 생각하기를 ‘3년 상을 정성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흐트러진 머리와 때가 낀 옷으로서 제를 마치고 상이 끝나는 날에 조용히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 절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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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효심이 깊어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사노(私奴)였던 승남은 궁노장(弓弩匠: 활과 쇠뇌를 만드는 장인)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쇠뇌[노(弩)]를 묻어놓은 곳에 갔다가 호랑이가 아버지를 물어갔다. 동행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피하여 달아났지만, 홀로 호랑이와 맞서 싸워 아버지를 구했다. 진주 시천리(矢川里)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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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진주 병사 겸 목사 신경원(申景援)의 선정을 기리는 비. 신경원[1581~1641]의 본관은 평산, 자는 숙헌(叔獻)이다. 1605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한 후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패전한 관군을 수습하여 반군을 대파함으로써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녹훈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분전하다가 적의 포로가 되어 단식 항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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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 신북문에 축조된 옹성. 옹성은 철옹산성(鐵甕山城)의 준말로, 큰 성문을 지키기 위해 성문 밖에 작은 성을 쌓는 것을 의미한다. 신북문 옹성은 진주성 전투에서 패한 뒤 축조된 진주성의 외성 중 하나이다. 진주성은 조선시대에 축성된 석축 평산성으로 원래 백제시대의 거열성(居列城) 터였다고 하며, 고려 공민왕 때에도 7차의 중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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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원래 순창(淳昌)의 사인(士人)이다. 호남에서 옮겨와 진주 덕산(德山)에서 살았다. 사람됨이 기개가 크고 효성스러웠다. 아버지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죽만 먹었으며, 밤낮으로 슬퍼하였다.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서 마을에 정문(旌門)을 내려주었으며, 그 효행이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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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고령. 자는 군흡(君洽).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따르면 사람됨이 평안하고 조용하며 스스로 지키어 명리를 구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따로 서당을 지어 후진들을 가르치는데 힘썼으며 날마다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어 스스로 즐겼다 한다. 진주 조동(槽洞)에 살았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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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여양진씨는 고려 인종 때의 장군인 진총후(陳寵厚)를 시조로 한다.「여양진씨대동보」에 의하면 진총후는 고려 예종조에 호분위 대장군을 지내고, 인종 때 이자겸의 난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워 신호위 대장군(神虎衛大將軍)에 오르고 여양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여양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1450년 전후 진식(陳寔)[15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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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학자 하진달(河鎭達)의 문집. 하진달은 단목에서 태어났고 자는 영서(英瑞)이며 호는 역헌(櫟軒)이다. 부친은 하해호(河海浩)이며, 생부(生父)는 하수호(河壽浩)이다. 자신은 선조들의 유업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 호를 쓸모없는 나무라는 뜻으로 역(櫟)을 사용했다. 하진달은 외모가 엄정하고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경전의 공부에 힘을 쏟고 예서를 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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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즉 담뱃대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약 550여 년 전부터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에 담뱃대를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며, 때문에 이곳을 ‘댓방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을 윤태섭(尹泰燮) 옹이 이어받아 담뱃대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담뱃대는 꼭지 반지름, 몸통, 물치의 크기에 따라 소죽(小竹), 중소죽(中小竹), 중죽(中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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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사노(私奴)였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그 행적이 전한다. 아우인 여상(汝祥)을 대신하여 북쪽으로 군역을 수행하러 떠났는데, 이는 아버지가 아우를 가장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대신 군역을 짊어져 아버지를 편안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정성을 다하여 상을 치렀으며, 아우도 극진히 보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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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시조 정습명(鄭襲明)은 고려 의종 때의 중신으로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냈으며, 선대에 정의경(鄭宜卿)이 연일 호장을 지냈고, 연일현백(延日縣伯)에 봉해졌으므로 본관을 연일로 하였다. 원래 연일정씨의 비조는 신라 6부시대의 지백호(智伯虎)로서 32년(유리왕 9)에 낙랑후(樂浪侯)에 봉해졌으며, 정씨라는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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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에 있는 재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병마절도사 겸 안주목사, 오위도총부총관을 지낸 허동립(許東岦)[1601~1662]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1710년(숙종 36)에 후손들이 힘을 모아 지은 건물이다. 평소 연(蓮)을 좋아하여 후손들이 대문 밖 뜰에 못을 파고 연을 심어 연당(蓮塘)이라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1807년(순조 7)에 중수한 것이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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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따르면 오인(吳仁)은 아버지가 등에 커다한 부스럼이 나서 매우 심해져 거의 죽을 지경이 되자 직접 입으로 농즙(膿汁)을 빨아서 낫게 하였다고 한다. 진주 수곡리(水谷里)에 살았다. 진주는 유교적 덕목이 뿌리 깊게 이어지는 예향(禮鄕)으로 오인을 비롯한 많은 효자를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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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 쪽 가계는 알 수 없고, 어머니는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보이는 박인(朴氤)의 천첩 후손이다. 사노비(私奴婢)였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매우 슬퍼하면서, 육식을 먹지 않았다. 사람들이 먹기를 권하면 형도 먹지 않는데 내가 어찌 먹겠냐고 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3년 동안 그 생활을 유지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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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의 둘째 아들이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투항하려 할 때 극력 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마의태자를 따라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하나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고, 김덕지의 14세손 김환(金環)이 고려 때에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영도첨의사(領都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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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에 있는 고택. 같은 마을에 위치한 이충무공 진뱀이유지(경상남도 기념물 제16호)와 관련된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죄인으로 몰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원균이 대패한 칠천량 전투지역을 둘러보고 권율 도원수가 있는 초계로 가던 중, 1597년(선조 30) 7월 27일 이곳 손경례의 집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리고 8월 3일에 이곳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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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서재. 박승임(朴承任)[1517~1586]은 본관은 반남, 자는 중포(重圃), 호는 소고(嘯皐)로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조좌랑 등을 거쳐 정언(正言)을 지내고, 소윤(小尹)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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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용아리 월아산 정상에 있는 기우단. 월아산 두 봉우리 중 북쪽 봉우리가 국사봉(해발 471m)인데, 일명 무지등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이곳에 기우단을 설치하고 가뭄 때 관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또한 이곳은 명당터로 소문이 나 세도가들이 암매장하였다가 파헤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곳에 묘를 쓰면 산신령이 도와준다고 믿어왔다.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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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밀양박씨는 시부모를 잘 봉양하고 남편을 공경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과부가 되었다. 슬하에 어린 아이가 있어 남편을 잃은 애통함을 억제하고 시부모를 위로하면서 30년간 수절하였다. 그동안 음식은 소채로 하고, 의복도 소복으로 하였으며, 세수하지 않고 머리에 빗질도 하지 않았다. 시부모가 중한 병이 들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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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의성김씨는 남편 유치덕이 강화에서 객사하자 천리 길을 왕복하여 시신을 짊어지고 돌아와 고산에 안장하였다. 그 후 14년이 지나 남편의 제삿날에 자녀들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남편을 따라 자결할 마음이 간절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어렸기 때문이다. 지금은 장성하여 내가 할 일을 끝냈다.”라 하였고,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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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정가(靜佳), 호는 역옹(櫟翁). 수찬 윤효빙(尹孝聘)의 둘째 아들이다. 진사에 합격하고 맏형 윤선(尹宣)과 함께 학문에 힘써 일찍이 높은 문명(文名)을 이루었다. 특히 사부(詞賦)에 뛰어났다고 한다. 진주 신당리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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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효자. 윤사관(尹思寬)은 부장(部將) 윤춘란(尹春蘭)의 아들이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윤사관이 살고 있던 집에 큰 불이 나서 노모가 방에 있으면서 나오지 못하자 직접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어머니를 업고 나오다가 불꽃에 쓰러져 모자가 함께 죽었다고 한다. 진주 대여촌(代如村)에 살았다.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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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진주병사 윤선정(尹先正)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윤선정의 본관은 파평, 자는 은로(殷老)로, 1611년부터 1613년까지 진주병사를 지냈다. 윤선정이 진주병사 재임 중 병사를 사랑하며 선정을 베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진주병영 군졸들이 1614년(광해군 6)에 세운 유애비(遺愛碑)이다. 지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뚜껑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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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파평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천성이 순수하고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잘 섬겼다. 아버지가 종기로 수개월 동안 자리에 누워 있자, 종기를 입으로 빨아서 치료했다고 한다. 그리고 꿩과 올빼미 등을 부모가 원하는 대로 올렸다. 부모가 천수를 다하여 세상을 떠나니 상중에도 슬퍼했으며, 비바람이 부는 날에도 성묘를 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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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신당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윤정양의 묘. 윤정양(尹廷揚)은 조선 인조 때 조산대부행장수현감사천진병마동첨절제사지사천현사권농관(朝散大夫行長水縣監泗川鎭兵馬同僉節制使知泗川縣事勸農官)에 오른 인물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신당리 죽산마을 서편 야산에 동남향하여 있다. 봉분은 사각 방형 석조분으로 봉분 중앙에 상석과 연꽃이 조각된 사각 향로석이 있다. 봉분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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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유학자 윤탁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남편인 윤탁이 병이 들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게 함으로서 소생시키는 등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다고 한다. 진주 금산리(琴山里)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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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의기사의 중건에 관한 기문. 진주성 내에 소재한 의기사는 1593년(선조 26) 제2차 진주성싸움 뒤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論介)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임진왜란 중 진주성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자, 논개는 왜장을 촉석루 아래 의암(義巖)으로 유인하여 함께 강물에 투신한 것이다. 이러한 논개의 의로운 기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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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 정약용(丁若鏞)이 논개 사당인 의기사에 부쳐 쓴 글. 의기사는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논개의 사당으로, 1740년(영조 16)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건립한 것이다. 1956년 의기창렬회에서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하였으며, 1983년 7월 20일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이 글은 1802년(순조 2) 다산 정약용이 지은 것이다. 의기사 기문의 원문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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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인숙(寅淑). 재예가 탁월하여 여러 번 식년과에 응시했으나 결국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후에 경기전(慶基殿) 참봉으로 제수되었다. 평소에 술을 즐겨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서울에도 집이 있어 중요 기관에 아는 이가 많았으나 높은 벼슬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네 명의 형제들과 더불어 서로 화목하니 당시 사람들이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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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직경(直卿). 문음으로 옥과(玉果) 현감에 제수되었다. 집에 있을 때에도 예로써 몸을 단정히 하였고, 자제들이 허물이 있으면 성년이 되어서도 매를 들었다. 향인과 더불어 술자리를 가지더라도 흐트러짐이 없고, 의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듣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냈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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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가 돌아가자 3년 동안 죽만 먹으며 크게 슬퍼하였는데, 결국 몸이 쇠약해져 거의 실성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진주 백곡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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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재령. 자는 사영(士英), 호는 묵인당(黙忍堂). 할아버지는 이태형, 아버지는 이용이다. 진주 초문리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유학을 바탕으로 하여 학행과 덕행에 힘써 당시 향리에 이름이 났으며, 이것은 그의 행장에 있는 자질이 청아하고 선을 즐기며, 시기를 멀리하는 수행에 전념함이라는 기록에서 볼 수 있다. 또 제자에 대한 공부가 엄격하고 제자의 능력과 적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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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함안인(咸安人) 이상립(李相立)이고, 아버지는 강태관(姜泰館)이다. 진주강씨는 어려서부터 품행이 정숙하고 총명하였다.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이상립이 우연히 병에 걸려 위독한 상황에 이르자 백방으로 조치하고 정성을 다해 간병하였으나 마침내 세상을 하직했다. 강씨는 곧바로 약을 먹고 남편의 뒤를 따라 죽었는데, 25세의 젊은 나이였다. 이 일이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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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재령. 할아버지는 현감 이공보(李公輔), 아버지는 이득분(李得賁), 남편은 이유성(李惟誠)이다. 진주 초문에 살았다. 어릴 때부터 부모를 지성으로 섬겼고, 시집가서도 부인의 도리를 잘 지키면서 시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다. 지아비가 죽자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빈소에서 16일 동안 엎드려 쌀알 하나도 목으로 넘기지 않았다. 3년상을 치르고 난 후 3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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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인경(仁卿), 호는 영모재(永慕齋).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의하면, 외모가 무게 있고 기품이 있으며 그윽하여, 비록 평소에 알지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견에 그의 거인장자(鉅人長者) 임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 이륜(彛倫)을 중히 여기고 은의(恩義)를 돈독히 하여, 자손에게 가르치기를 먼저 의를 행하고 문예를 뒤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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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정씨는 15세의 나이에 남편 이인호가 요절하자, 오히려 시부모를 위로하고 조금도 비통해하는 빛이 없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남편의 뒤를 따라 자진하려 했다. 진양정씨의 부모가 그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 개가를 시키려 하자 가만히 방으로 들어가 자결하였다. 이에 향인들이 진양정씨의 열행을 가상히 여겨 비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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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함안이씨 나이 16세에 남편이 중한 병에 걸려 요절하였다. 함안이씨는 이를 깨물고 스스로 맹세하더니 마침내 식음을 전폐하고, 요절한 남편을 따라 생을 마쳤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함안이씨의 열행을 기려 비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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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신씨는 16세의 나이에 시집을 갔는데, 다음해에 남편 이충엽이 요절하자, 염습의 준비와 장례 음식을 몸소 다하였다. 어느 날, 부실(副室) 김씨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고 자식도 없는데 살아서 무엇을 하겠는가.”라 하고 눈물을 흘리니 듣는 사람 역시 또한 슬퍼했다. 부실 김씨는 이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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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 소장 고문서 중 별급문기. 이탁의 본관은 전의(全義), 좌승지를 지낸 이종문(李宗文)의 손자이다. 이탁의 사위 하명은 1660년(현종 1) 식년 진사시에 입격했는데, 병환 중에 사위의 입격 소식을 들은 이탁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노비 1구와 전답 15마지기를 지급한 것을 문서로 작성한 것이다. 과거 합격에 따른 재산 지급은 별급의 전형적인 형태에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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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재령. 아버지는 이태로(李台老)이다. 하응림(河應霖)의 아내로 일찍이 남편을 잃고 시아버지를 홀로 봉양하며 살았다. 늘 남편의 후사가 없는 것을 한탄하다가 남편의 기일을 맞아 제사를 지내고 곡을 하고는 자결하였다. 효열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받았다. 『삼강록(三綱錄)』에 실렸고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녀조(烈女條)」에도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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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자중(子中). 이공청(李公淸)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강개하고 조행(操行)이 있었다. 극진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겨, 비록 전란으로 피난해야 할 상황에서도 반드시 그 예를 다하였다. 불행히도 일찍이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진주 대여촌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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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부, 열녀. 매헌(梅軒) 이인형(李仁亨)의 자부이며, 이핵(李翮)의 처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딸이다. 14세 때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어머니에게 마시게 하여 중병을 낫게 하였다. 시집와서는 시부모 섬김에 있어서 지성이었으며, 남편이 죽자 뒤따라 자결하였다. 나라에서 이 사실을 알고 진주 가좌촌(嘉佐村)에다 효열부 정문을 세웠다. 현재 경상남도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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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재령. 자는 낙천(樂天), 호는 송재(松齋). 정랑(正郞) 이세후(李世垕)의 후예로, 할아버지는 이홍필, 아버지는 이동연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학문에 진력하였다. 향리에서 조용히 수행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선비로 예의범절이 뛰어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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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재령. 자는 이문(以聞), 호는 제헌(霽軒). 성재(誠齋) 이예훈(李禮勛)의 후예로, 할아버지는 이강, 아버지는 이중복이다. 어버이가 병들었을 때 변을 맛보아 가며 보살피고, 하늘에 쾌차를 빌었다. 상을 당했을 때에는 여묘에서 제를 마쳤다. 이러한 행실로 인해 향리에서 유학의 실천이 우수하다는 평을 들었다. 특히 이형의 행장에는 ‘품성이 강직하고 행동이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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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용선(庸善), 호는 사가(四可). 성재(誠齋) 이예훈(李禮勛)의 후손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형제간의 우애 또한 매우 돈독하여 어버이의 뜻을 어기는 바가 없었다. 어머니가 이질에 걸려 몇 달을 병석에서 신음하자 하늘에 오래 사시기를 빌면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약으로 마시게 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에는 재산을 기울여 명당을 구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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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덕랑(通德郞) 강운(姜沄)의 처인 인천이씨의 열행(烈行)을 기린 비각. 인천이씨(仁川李氏)는 당시 효자이던 좌통례(左通禮) 이교(李郊)의 딸이다. 나이 20세에 강운에게 시집왔는데, 24세에 남편의 상을 당했다. 인천이씨는 그 뒤 평생 동안 매운 음식을 먹지 않고, 옷도 빨아 입지 않았으며, 머리도 빗지 않고 불편한 생활을 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곡을 하면서 상을 당하였을 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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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공예품 중의 하나인 장도(粧刀:칼집이 있는 작은 칼)를 만드는 장인. 장도는 소도(小刀)의 일종으로 처음에는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휴대용에서 출발하였다. 이후 점차 용도가 다양해지면서 주머니에 넣어 다닌다고 하여 낭도(囊刀)라고도 하고, 허리에 차고 다닌다고 하여 패도(佩刀)라고도 하였다. 칼을 만드는 소재에 따라서도 은장도·목장도·골장도·금장도·뿔장도 등이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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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장한우(張翰佑)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김해김씨는 나이 18세 되던 해에 결혼하였는데 시댁에 가기도 전에 남편이 요절하였다. 김씨는 머리를 풀고 달려가서 애통해 하더니 성복하는 날에 칼을 물고 엎드려 남편의 뒤를 따르니, 고을 인사들이 비를 세워 김해김씨의 열행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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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시조는 고려의 중신 이우칭(李禹偁)이다. 이우칭은 경주이씨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의 7세손으로 고려 초·중기에 보조공신(輔祚功臣)에 책록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후 재령군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재령을 본관으로 삼았다. 원래 경주이씨였으나 이때 분관하였다. 모촌 이정(李瀞)은 임진왜란 후, 덕천서원의 원장을 맡아 원우를 중건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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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옥산리에 있는 비. 1694년(숙종 20)에 진주 유림들의 공의로 창건되었던 정강서원의 옛터에 세운 비이다. 정강서원은 창건 후 거유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고 유생들을 가르쳤고, 1720년에 이르러서는 9인의 학자를 배향 봉사하면서 구현사(九賢祠)라 하였다가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배향된 학자는 우곡 정온(鄭溫), 수헌 강숙경(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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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길재(吉哉), 호는 남호(南湖). 공대공(恭戴公) 정척(鄭陟)의 후손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얼굴이 곱고 기상이 맑으며 경전(經傳)을 널리 연구하고 겉으로 백가(百家)에 통달하였다. 종일토록 책상을 대하고 사색에 잠겼으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효심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병에 걸리어 낫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니 관대(冠帶)를 벗지 않고 단을 모아 하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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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백유(伯裕). 참봉 정석찬(鄭碩贊)의 아들이다.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함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정엄(鄭嚴), 정교(鄭敎) 두 아우가 모두 명성을 얻어 이름이 났으나 과거는 여러 번 실패하여 합격하지 못하였다. 봉화훈도(奉化訓導)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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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양. 자는 성약(聖若). 우곡(隅谷) 정온(鄭溫)의 후손이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학문을 좋아하였고 어버이를 섬김에 그 성효(誠孝)를 다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정규로는 나이 겨우 17세에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끊어 잠시 회생시켰다. 겨우 5일이 지나고서 아버지가 또 갑자기 병들어 양우(兩憂: 부상과 모상)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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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성산이씨는 본래 성품이 착하고 효성스러웠는데, 남편 정규로가 병이 들자, 집이 가난한 탓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돈을 마련하여 약을 구했다. 또 남편 대신 자신이 죽기를 하늘에 기원했다. 마침내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예로서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침실로 들어가 자진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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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사상(士相), 호는 반곡(盤谷). 효자 정보(鄭堡)의 장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따르면, 정내의(鄭乃毅)는 효성이 하늘에서 타고나서 어려서부터 부모를 잘 섬기며 부모의 뜻에 순응하여 어김이 없었다. 이미 자라서는 집안에서 배운 대로 몸소 행실을 삼가고 학문에 힘써 문학이 일찍부터 이루어져 여러 번 향해(鄕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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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공약(功若), 호는 관란(觀瀾). 승지(承旨) 정대융(鄭大隆)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따르면, 정달현(鄭達賢)은 효성이 깊다고 이름이 나서 나라에서 교관(敎官)을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명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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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여길(汝吉), 호는 여우재(如愚齋). 생원(生員) 정문익(鄭文益)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문장이 넉넉하고 넓으며 지조가 높고 고상하였고, 가정의 교훈을 잘 지키고 따르며 자취를 거두고 숨겨서 기르니 주변의 선비들이 그 풍채와 용모를 칭송하였다고 한다. 정대형(鄭大亨)은 장수(長壽)하여 후에 품계가 가선(嘉善)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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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생원진사시의 합격자 명단. 경상대학교 소장 『정덕계유사마방목』은 명(明) 무종(武宗) 정덕(正德) 8년이자, 조선 중종 8년인 계유(癸酉)년, 즉 1513년에 실시한 생원진사시의 합격자 명단이다. 방목은 1책 24장으로 1행 18자 유계(有界) 10행, 주(註) 쌍행으로 되어 있고, 크기는 가로 20㎝, 세로 32.2㎝이고 반곽(半廓) 크기는 가로 16㎝, 세로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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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유성(由聖), 호는 송죽헌(松竹軒).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현손이다. 효성과 효우가 남달랐고, 오랫동안 잃었던 선조의 묘를 찾을 때에는 태(笞: 작은 곤장)를 잡고 스스로 벌하였고, 3대 동안 나누었던 가산을 합하여 한 집에서 함께 살았다.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와 더불어 도의의 친구로 삼았다고 한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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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행지(行之), 호는 모렴(慕濂).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후손이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머니의 상중일 때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치도록 죽과 밥을 들지 않고 보릿가루를 물에 타 마셨다. 새벽과 저녁으로 묘에서 곡한 뒤 냇물을 건너 수 리나 떨어져 있는 아버지를 찾아가 보살펴 드렸다. 이 일을 비록 추울 겨울일지라도 그치지 않고 지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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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선비.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성빈(聖彬).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현손(玄孫)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따르면,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기상이 높고 반듯했다고 한다. 집안에서도 법도가 있으며, 뛰어난 학문과 의로운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이 칭송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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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사원(士元), 호는 기옹(綺翁)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따르면, 진사에 합격하고 호남으로부터 침곡(針谷)으로 옮겨와서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태계(台溪) 하진(河溍), 학포(學圃) 정훤(鄭暄)와 더불어 교유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문장을 서로 지어 주고받아 시문(詩文)이 제현(諸賢)의 문집 가운데서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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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선비. 자는 거원(巨源)으로,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둘째 아들이다. 황암(崲岩) 박제인(朴齊仁)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아 짧은 기간에 학문을 성취할 수 있었다. 나이 28세 때 어머니 상을 당하자 슬퍼함이 예를 넘어서 병이 들 지경이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감찰(監察)을 추증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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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장기(長鬐). 자는 중상(仲祥). 일찍부터 문명이 있었으나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남을 대접함에 있어서는 정성으로써 하였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공평하게 하였다. 강심(姜深), 신점(申霑)과 더불어 요역(徭役)시행을 시정하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며 진양(晋陽)의 삼로(三老)라고 일렀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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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청송심씨는 남편 정문혁이 병에 걸려 수개월을 간병하였으나 위독한 지경에 이르자, 도끼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게 하였다. 그러나 소생의 기미가 없자 기절했다가 곧 일어났다. 이에 시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자식이 노모를 버리고 갔는데 애통하여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 하고 미음을 만들어 드렸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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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복여(福如), 호는 운파(雲坡). 우곡(隅谷) 정온(鄭溫)의 후손이다.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의하면, 천성이 영민(穎敏)하고 재예(才藝)가 남들보다 출중하였다. 김단계(金端磎), 박만성(朴晩醒)을 따라 학문을 연마하였다. 고려 말 문신이었던 정온이 태조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지은 우곡정(隅谷亭)[경상남도 진주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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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임경(林卿), 호는 원재(源齋)이다. 어릴 때부터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부모(父母)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더우면 베개머리에서 부채질하고, 추우면 더운 이불을 덮었으며, 밖에 나가서 고기나 과일을 얻으면 반드시 품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서 어버이에게 드리었다. 밤에는 책을 읽고 낮에는 땔감을 베었으며 항상 맛있는 음식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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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최씨는 어려서부터 심성이 착하고 효성스러웠는데, 18세에 시집가서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겼다. 남편 정세현(鄭世鉉)이 병을 얻어 위독한 지경에 처하자, 울면서 시어머니께 이르기를 “지아비가 죽으면 지어미는 따르는 것이 도리이니 맹세코 장차 같이 갈 것입니다.”라고 하고 손가락을 잘라 입에 대어 넣고, 하늘에 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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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회일(會一). 징질와(懲窒窩) 정유기(鄭有祺)의 증손이다. 일찍이 사마(司馬)에 올라 뛰어난 문장과 효우(孝友)로 이름이 나, 세 번이나 천거되었으나 임용되지 못하자 주위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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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현감 정세창(鄭世昌)의 아들로, 형은 정인평(鄭仁平)이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따르면, 정순평은 만년이 되어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애통해하며 죽만 마시다가 상중에 죽었다. 진주 진성리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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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의하면, 정승개는 천성이 착하고 친족들과 돈독하게 지냈으며 이웃에게 화목하였다. 여러 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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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한명(漢明), 호는 소헌(素軒). 동오(東塢) 정우교(鄭佑敎)의 아들이다. 진주 가곡(佳谷)에 살았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모친상을 당해 슬픔이 도를 넘었고, 날마다 반드시 묘(墓) 앞에 문안인사를 하고는 피눈물을 흘리어 옷깃이 썩었다. 이웃이 그 효성에 감동해 글을 주목(州牧)에게 올렸으나 조정에 보고하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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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수백(壽伯).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증손이다.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을 날렸으나 문과에는 실패하고 무과에 급제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렸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깊어 어머니의 병환 때에는 귀한 물고기와 산삼을 구해 병을 고쳐 드렸고,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죽으로만 3년을 연명하며 예를 다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복하여 경상감사에게 알려 세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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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字)는 수백(壽伯). 필한(筆翰)이 정묘(精妙)하였으나 여러 번 문과에서 낙방하고 무과에 급제하였다. 어머니의 병이 4년을 계속되자 변을 맛보아 가며 그 차도를 징험하였고 눈 속에서 고기를 얻고 영산(靈山)에서 삼(蔘)을 얻으니 신명(神明)의 감응이 있은 것이었다.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죽만 마셨고 슬픔을 하루와 같이 하였다. 향리에서 그 효행에 감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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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연(子淵).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김에 유순하여 부모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병들었을 때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 하루 동안 회생해 있도록 하였고 상을 당해서는 슬픔으로 예를 다하니 향리에서 이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진주 가곡(佳谷)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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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원경(源卿), 호는 일재(一齋).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다. 천성적으로 신중하고 과묵하며, 학식이 풍부하고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성실하게 지체(肢體)의 봉양을 다하였다. 부친이 마비를 앓아 7년이나 병상에 누워있을 때에도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부친의 몸을 닦아주고, 변기를 몸소 세척하여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아니하였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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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김해김씨는 나이 22세가 되던 해에 시집을 갔는데 남편 정연항(鄭蓮恒)이 14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부모가 김해김씨를 가엾게 여겨 다시 시집보내려 하자 금약을 마시고 죽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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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윤원(允元), 호는 모재(慕齋).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후손이다. 성품이 침중하였으며,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겼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학질을 앓았다. 새벽마다 어머니가 쾌차하시기를 빌었더니 홀연히 새매가 메추리를 떨어뜨렸다. 이를 세 번에 걸쳐 드리니 어머니의 병이 드디어 나았다. 나이 34세에 병사하자 그 아우 정낙균이 형의 죽음을 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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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재령이씨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대신 전처 소생의 딸이 있었다. 남편이 병에 걸려 위독한 지경에 처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이고, 하늘에 남편의 쾌유를 기원했다. 남편 정운창(鄭運昌)은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고 늙은 시부모와 전처의 딸, 그리고 후사를 들여 종가를 이을 것을 부인에게 부탁하였다.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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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공서(公瑞).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의 손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조선 후기의 문신인 도암(陶菴) 이재(李榟)[1680~1746]가 화상을 기리어 이르기를 ‘용의가 깨끗하고 상쾌하며 문장도 또한 같았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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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수계(壽季), 호는 징질와(懲窒窩). 진사 정대영(鄭大榮)의 아들이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고 병의 간호에 10년 동안 한결같았다. 상을 당하여서는 슬픔으로 몸이 상할 지경이 되었다. 형제 네 사람이 함께 살면서 강학(講學)과 학문을 기쁜 마음으로 하였으며, 곧은 마음을 안고 스스로 편안히 지냈다. 독서차록(讀書箚錄)을 집안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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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호는 봉강(鳳岡).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손자다. 어릴 때부터 글을 지으니 할아버지 정문부가 매우 기특히 여기고 사랑하였다. 행실에 있어서 효제(孝悌)로써 근본을 삼고 학문을 함에 형제가 함께 살면서 밤낮으로 강론하고 연마하니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와 여러 학자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숙종 때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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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신화(愼和), 호는 모헌(慕軒). 은렬공(殷烈公) 정신령(鄭臣嶺)의 후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성품이 본래부터 효우(孝友)스러웠고 심학(心學)에 전념하였다. 이광악(李光岳)의 문하에 있으면서 정온(鄭蘊), 허목(許穆), 하홍도(河弘度) 제현으로 더불어 도의를 서로 연마하였다. 청계사((淸溪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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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현감을 지낸 생원(生員) 정세창(鄭世昌)의 아들이다. 진주 진성리에 살았다. 나이가 들어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슬픔에 몸이 상할 정도였으며, 죽만 먹어 겨우 연명하였다. 아우인 만호(萬戶) 정순평(鄭順平)도 역시 죽으로 연명하다가 상중에 죽었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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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진주 성태동(省台洞)에 살았다. 그 어머니와 함께 밤중에 방아를 찧던 중 어머니가 범에게 물려가게 되자 절구공이를 가지고 급히 쫓아가서 위험에 처한 어머니를 구했다고 한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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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김해허씨는 일찍 남편을 잃어 후사가 없었고, 또한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정성을 다하여 시부모를 모셨다. 어느 날 병상에 누워있던 시아버지가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여 하늘에 빌자, 얼마 후 꿩이 갑자기 날아들어 처마 밑으로 들어왔다. 이를 잡아 만든 꿩 요리를 시아버지께 올렸더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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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심원(深源).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천성이 온순하고 행실이 정직하였다. 아우 정렴(鄭濂)과 더불어 박황암(朴篁岩)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의 요점을 얻었다. 저술한 유문이 불에 타서 소실되니 다 잃으니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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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옥여(玉汝). 호는 은와(隱窩).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후손이다. 도량이 넓고 품성이 온후하였다. 9세에 부친상을 만났는데 장례를 행함이 한결같아, 성인과 같이 법도에 따랐고 처세에 모범이 되었다. 경림서원(慶林書院)[경상남도 진주]과 종천서원(宗川書院)[경상남도 진주] 등 두 서원의 원장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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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해주인 정창석(鄭昌錫)이고, 아버지는 이시영(李時榮)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합천이씨는 남편 정창석이 병이 들어 죽었으나, 나이 서른에 가깝도록 자녀가 없는 것을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다. 또 관에 넣을 물건들을 손수 챙기고, 남편의 형에게 부촉하여 남편의 후사를 정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밤에 남편의 시신이 있는 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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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정평리 응석사(凝石寺) 뒷산에 있는 조선시대 무덤 유적. 조선시대 전기의 사대부묘로 추정된다. 문인석의 형태로 보아 선조 후반에서 인조 연간에 걸친 17세기 전반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에 위치한 삼국시대에 초창된 사찰로 알려진 응석사의 경역 내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유적은 이미 원형을 잃었고, 문인석 1개도 도난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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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응원(應遠), 호는 운파(雲坡).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후손이다. 천성이 순후(淳厚)하고 효우(孝友)가 돈독하였다. 아버지가 병이 들자 6년 동안 손수 약을 달여 드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예서(隷書)를 쓰는 데 능했다고 한다. 당시에 세간에서 진주 운곡(雲谷)에 여덟 명의 재사(才士)가 있다고 일컬었는데 정한균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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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군성(軍聖), 호는 가헌(稼軒).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후손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어머니가 병으로 십여 년을 누워 지냈다. 동생 정석기(鄭碩基)와 함께 지성으로 간호하며 매서운 추위와 혹심한 더위에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빨래까지도 아내나 가족에게 맡기지 않고 몸소 하였다. 정성을 다하여 보살핀 결과 어머니의 병이 점점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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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진사 정대호(鄭大護)의 아들이다.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어머니가 병들어 점점 심해지니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올리는 등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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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무신. 자는 학연(學然), 호는 만초(晩樵). 정철기(鄭喆基)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도량이 넓고 마음씨가 의연하였다. 어릴 적 무과에 올라 장위영참군(壯衛營參軍)에 기용되었다가 얼마 후에 시종원우시어(侍從院右試御)에 올랐다. 왕의 호위 임무를 맡으면서 왜병의 범궐(犯闕)이 있었을 때 선전관 윤영선(尹映宣)과 함께 칼을 차고 바로 궐 아래로 달려가 임무를 완수하여 신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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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사응(士膺). 정인평의 양자이다. 성품이 순후하며, 모자라거나 지나침이 없었다. 또한 예를 행함에 있어서도 그 정성을 다하였으며, 행동하는데 조금의 잘못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탄복하고 칭찬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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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연일. 자는 성원(聲遠)이고, 호는 삼비재(三非齋).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고, 집안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법도가 있게 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행적을 드러내지 않고,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조선 중기 진주 지역의 유학자였던 월촌(月村) 하홍달(河弘達)이 재명(齋銘)을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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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남계(南溪) 정승윤(鄭承尹)의 아들이다. 타고난 재주가 매우 뛰어났으며 학식이 깊고 넓었다. 그러나 과거를 보아 영달을 꾀하는 일을 경계하고 자중하며 더욱 학문에 매진하여 유림에서 추앙을 받았다. 배우기를 즐겨하여 학문에 힘썼고, 행동에 절제가 있어 친우가 많았으며, 모두 그의 덕을 흠모하였다. 정효생의 죽은 뒤 하태계(河台溪)가 만시(挽詩)에서 이르기를 ‘공(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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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현감인 정희건(鄭希騫)의 첩이다. 진주 대여촌에 살았다. 정희건이 경성에서 벼슬을 하게 되자 성씨에게 글을 보내어 인연을 끊자고 하였다. 문족들이 그녀의 나이 어린 것을 가련하게 여겨 다른 이를 따르라고 권하였으나 죽을 때까지 절개를 지켰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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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낙붕(樂朋), 호는 운곡(雲谷). 우곡(隅谷) 정온(鄭溫)의 후예이다. 머리가 매우 좋고 총명하여 일찍이 이름이 있었다. 또한 학문에도 조예가 있었다. 문장을 지을 때의 기교가 매우 뛰어나 사람들이 감탄하였으며, 필력(筆力)이 좋아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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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1392년(태조 1) 진주를 진양이라 하고 태조현비의 내향이므로 목을 높여서 진양대도호부라 개칭, 진양대도호부사를 두었다. 1402년(태종 2) 진양을 진주로 고치고 대도호부를 목으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의 대대적 개편 때 진주는 목으로서 정3품의 목사가 배치되고, 그 아래 판관(종5품)과 교수(종6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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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강씨는 천성이 착하고 효성스러웠는데, 시집가서는 홀로된 시어머니를 부모를 섬기듯이 잘 모셨다. 남편 조용한이 병이 들자, 진양강씨는 자신이 대신 죽기를 하늘에 기원하며 남편을 간호했다. 남편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러 가족들이 진양강씨를 찾기 시작하였는데, 기원하던 장소에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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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함안인 조인제(趙麟濟)이고, 아버지는 사인 하정식(河廷植)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하고 효성스러웠는데, 10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자 매우 애통해 하였고, 아버지가 낙상을 하여 여러 달을 자리에 누워 있자, 밤낮으로 그 곁을 지키면서 정성껏 간병하였다. 15세 되던 해에 시집을 갔으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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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재령이씨는 결혼한 지 겨우 1년 만에 남편이 중병에 걸려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정성을 다해 간병하였으나 힘이 미치지 못했다.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임신 중이었으므로, ‘천행으로 아들을 낳으면 대가 이어지는 것이지만, 만약 딸을 낳으면 남편의 뒤를 따라 갈 것이다’라 하였다. 해산하니 과연 딸이어서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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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평촌리 중도마을에 있는 전통가옥.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평촌리 중도마을에 위치한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겹집으로 정면에 둥근 기둥을 배치하고 나머지는 각이진 기둥을 사용하여 기둥을 세웠다. 내부에는 부엌 1칸, 안방 2칸, 마루 1칸, 건넌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방과 건넌방에는 상부에 다락방을 설치하였고, 대창의 상부에는 소란반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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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사노(私奴)였다. 어머니가 나이 들자 봉양하는데 효성을 다하였고, 돌아가시자 장사에 정성을 다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는 사죽리(沙竹里)에 살았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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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여양(驪陽). 자는 군성(君聖).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가 병들매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소생시켰다. 상을 당해서 시묘살이를 하던 중, 들에 불이 나서 온 골짜기가 다 타고 묘소와 여막까지 불에 탈 위기에 처했으나 돌연 바람이 둘러져서 불이 저절로 꺼졌다 한다. 고종 때 정려(旌閭)되었으며,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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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고려 전기 때의 장군 강민첨의 탄생유적지. 강민첨은 고려 전기의 명신 겸 장군으로 본관은 진주, 태어난 곳도 진주이다. 1018년(현종 9)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침입하자 강감찬(姜邯贊) 장군을 도와 부원수로서 귀주전투에서 적을 격파, 전승을 거둔 바 있다. 그 공으로 1019년에 응양상장군주국이 되고, 곧 이어 우산기상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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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우수리 일대에 있는 조선시대 고분군.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우수리 산 162번지 일대에 있다. 진주시 평거동에서 명석면 쪽으로 가다가 우수골에 못 미쳐서 좌측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야산에 오르면 고분군이 나온다. 발굴조사는 실시되지 않았다. 분묘의 외형은 지대석, 면석, 갑석으로 마련된 둘레돌 위에 흙으로 봉토를 쌓아 올린 것으로 평면상 장방형의 형태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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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검암리에 있는 운수당 하윤묘에 세워진 석상 2구. 이 2기의 석상은 조선시대의 문신인 하윤묘의 하단의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하윤[1452~1500]의 자는 수부, 호는 운수당으로 1414년 생원에 입격하였다. 아버지는 거제 현령을 역임한 하계지(河繼支)이고, 할아버지는 산음 현감을 역임한 하순(河淳)이다. 2기의 석상은 높이 2.3m의 거상으로, 분묘의 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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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대우마을에 있는 진양하씨 재실. 낙수암은 진양하씨 재실로 송정 하수일을 위해 세워졌다. 낙수암에는 진주 사곡리 진양하씨송정종택소장책판이라는 진양하씨 송정종택에서 보관하고 있는 4종의 책판 판목이 한 때 보존되어 왔던 곳이기도 하다. 이 책판들은 16세기 후반 남명학파의 면모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최근 진양하씨 후손들이 송정 하수일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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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냉정리 산 317-3번지에 있는 이정표. 조선시대의 이정표 비석으로 천태산 마구 할머니에 관한 전설과 연관되어 있다. 천태산 마구 할미가 진주성을 쌓기 위해 세 개의 바위를 한 개는 머리에 이고, 한 개는 지팡이로 짚고, 마지막 한 개는 치마에 담아 가져오고 있었다. 도중에 진주성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팡이로 짚고 오던 바위를 마침 있던 자리에 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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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두문리 산 103-1번지에 있는 푯돌. 진주시와 사천시의 경계를 표시하여 이정표 역할을 하던 푯돌로 1991년 12월 23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7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천태산 마귀 할머니가 사천시의 두량리 큰골 방향에서 물레를 하려고 바위 3개를 옮겨 오는데, 1개는 머리에 이고, 1개는 지팡이로 짚고, 1개는 치마에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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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진주의 향사당 내에 존재하고 있던 벽오당(碧梧堂) 건물의 현판. 벽오당은 원래 조선 태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호정 하륜(河崙)[1347~1416]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자 태종(太宗) 임금이 직접 내린 교서를 봉안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임금은 특별한 예우로 잔치를 베풀고 친필인 벽오당(碧梧堂) 현판을 하사하였다. 진주 향사당(鄕射堂) 뒤에 벽오당을 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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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加芳里)에 있는 조선 중기의 누각(누정) 건물.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慶尙右道) 학자들이 모여 학문을 닦던 장소였다. 부사정(浮査亭)의 ‘부사(浮査)’는 부사 또는 야로(野老)로 불려지던 성여신(成汝信)[1546~1632]의 호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성여신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공실(公實), 호는 부사·야로로 남명 조식(曺植) 선생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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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에 위치한 송정종택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시대 고문서. 진양하씨 송정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들로서 분재기(分財記), 소송입안(訴訟立案), 호구단자(戶口單子), 토지매매문서(土地賣買文書), 소지(所志), 등장(等狀), 품목류(稟目類), 완문(完文), 절목(節目), 전령(傳令), 제음(題音), 초사(초사), 수기(手記), 위장(慰狀), 만장(輓狀),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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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때 경상남도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였던 관아 영남포정사의 정문. 조선 광해군 10년(1618) 병사를 지내던 남이흥이 내성의 동쪽문을 고쳐 세우고 옆에 대변루(待變樓)를 새로 지었는데, 이것이 망미루의 본래 건물이다. 후에 1895년(고종 32)에 전국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로 시행됨에 따라 진주부가 설치되면서 진주관찰부의 선화당 관문이 되었다. 1896년에 전국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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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촉석루에 있는, 의기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 1593년(선조 26) 6월 29일 임진왜란의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이 바위에서 남강에 뛰어들어 순국하였다. 논개의 의열(義烈)을 상징하여 진주의 선비와 백성들이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고 명명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촉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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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이 군사를 훈련시키던 유적지. 당시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백의종군을 하면서 초계(草溪)에 있던 권율(權慄) 도원수(都元帥)의 휘하에 있던 중 이곳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의 임명 교서를 받은 후 이 일대에서 군사들을 훈련시켰다고 전해진다.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진뱀이’라고 부르고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 717-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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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사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에 맞서 싸운 진주성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등 39위와 모든 군졸의 신위를 안치하기 위하여 1595년 경상감사 정사호(鄭賜湖)가 건립하였다. 1607년 창렬사라 사액되었고, 1712년(숙종 38) 병사 최진한(崔鎭漢)에 의하여 중수되었다. 김시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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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월아산에 위치한 청곡사의 대웅전. 청곡사는 879년(헌강왕 5)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다. 1380년(우왕 6) 실상사의 상총대사(尙總大師)가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602년(선조 35) 계행대사(戒行大師)와 극명대사(克明大師)가 다시 중건하였고, 1612년(광해군 4) 다시 대웅전을 비롯하여 사찰 전체를 중수하였다. 조선 말기 포우대사(布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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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117[용암길 59-2]에 있는 사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를 제향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본래 귀곡동에 있었는데, 1995년 남강댐 공사로 인하여 현재의 장소로 이건하였다. 정문부는 호가 농포(農圃)로, 함경도 경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길주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그 전공으로 길주목사가 되었다. 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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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여성검무. 황창무에서 비롯된 검무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무용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인데, 진주검무를 진주검기무 또는 진주칼춤이라고도 하며 대궐 안에서 열렸던 잔치 때 행하던 춤의 하나이다. 진주검무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죽은 소년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춤을 추었다는 설과 논개의 얼을 달래기 위해 진주기생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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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계동 38번지[진주대로 1110] 일대에 남아 있는 관아터. 관아의 건립경위나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다. 경상남도 진주시 계동 38번지[진주대로 1110] 일대에 남아 있다. 지금의 한국통신 진주전화국이 있는 일대이다. 이곳은 원래 진주목, 진주군의 관아가 있던 곳이다. 1895년(고종 32) 5월 26일에 칙령 제98호에 의거 1413년(태종 13) 이래로 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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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덕곡리 산 1번지 정상부에 있는 봉수대. 광제산봉수는 조선시대 5거(距) 봉수노선 중 제2거 노선의 간봉으로 남쪽의 망진산봉수(望晉山熢燧)의 신호를 받아서 북쪽에 위치한 단성(丹城) 입암산봉수(笠巖山熢燧)로 신호를 전달하였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및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의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에 ‘광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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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지방의 교방에서 추어지던 춤. 진주교방굿거리춤은 ‘기방굿거리’, ‘굿거리춤’, ‘수건춤’, ‘입춤’으로도 불리는 춤으로 주로 3분박 4박자에 맞추어 춘다. 고려 문종 때 들어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1900년대 이후 진주교방굿거리춤은 승무와 더불어 여기(女妓)들에 의해 교방에서 예술적으로 다듬어졌다. 고종 황제 때 여기(女妓)로 활동했던 최완자가 1940년대부터 당대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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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초전동 진주동명고등학교 교정에 있는 귀부와 이수. 귀부(龜趺)의 거북등무늬[龜甲紋]는 오각형을 이루고 있다. 이수(螭首)는 대체로 원통형에 가까우며, 이수의 전·후면에는 구름을 보상화문(寶相花文)의 형태로 꾸며놓았다. 측면에는 원숭이가 용으로 화하여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을 각출(刻出)시켰다. 진주동명고등학교 석조귀부 및 이수는 원래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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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진주성의 북문. 진주성은 고려 말까지는 토성이었으나,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석성으로 수축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병사 김수와 이수일이 성을 증축하면서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게 되었고, 광해군 때 남이홍이 성을 증축하면서 11개의 포루를 설치하게 되었다.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어져 있던 진주성은 한일합방 이후 원형이 훼손되어 내외성의 구분이 사라졌으며,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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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하마비(下馬碑).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 및 궐문 앞에 세워놓은 비로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글이 적혀 있다. 진주는 1604년(선조 37) 이래로는 경상도 우병영, 1895년에는 진주관찰부, 1896년 이래로는 경상남도관찰사가 있던 곳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수령 이하 모든 관리와 일반인은 말에서 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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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의 서북쪽에 위치한 누각. 현판에는 진남루(鎭南樓)로 되어 있으나, 진주성의 북쪽에 위치하여 북장대로 불린다. 또한 내성의 북쪽 끝에서 내성과 외성에 주둔한 병사 모두를 지휘할 수 있어 공북루(拱北樓)라는 별칭이 생겼다. 1584년(선조 17) 목사로 부임한 신점(申點)이 처음으로 세웠다.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167번지 진주성 서북쪽의 높은 언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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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진주성의 배치도. 현존하는 「진주성도」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진주성도」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진주성도」이며, 나머지는 『여지도서』에 실린 「경상도우병영지지도(慶尙道右兵營之地圖)」이다. 영남대학교 박물관에도 「진주성도」가 있다는 기록을 보았으나 직접 보지는 못했고,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진주대아고등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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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성전암 대웅전에 봉안된 조선 중기의 불상. 진주 성전암 목조여래좌상의 배 안에서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1644년(인조 22)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목조로 제작된 높이 60㎝, 폭 43㎝의 작은 여래좌상이다. 머리 부분은 상투 모양의 육계와 중앙계주의 표현이 있으며, 작은 입을 꼭 다문 모습으로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인 모습이다. 옷자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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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개와 풍류를 지닌 진주 기생들의 생활 모습과 그로 인해 형성된 문화상. 진주의 논개(論介), 평양의 계월향(桂月香)으로 인해 ‘남 진주, 북 평양’란 말이 회자될 정도로 진주의 풍류와 멋은 그 명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조선 기녀하면 “일강계(一江界), 이평양(二平壤), 삼진주(三晋州)”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다. 1910년 1월 7일자 『경남일보』에 위암 장지연(張志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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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 진주향교 입구에 있는 비. 진주향교 출입자를 통제하기 위해 세운 비로, 여기에 출입하는 자는 누구라도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함을 알린 내용의 비이다.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 및 궐문 앞에 세워놓은 비로,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글이 적혀 있다. 진주향교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창건된 향교로, 임진왜란 때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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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년에 제작된 진주 지역의 향안(鄕案). 원 소장자는 강태중(기증당시 68세, 경상남도 진주시 주약동 거주)이었으며, 소장처는 경상남도 진주시 칠암동 531-29번지[강남로131번길 4-3], 기증일은 2004년 8월 17일이다. 강태중이 집안에서 전해오던 고문서 39점을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진주향안』은 그 중의 하나였다. 『진주향안(晋州鄕案)』은 현재 3종이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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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정평리에 있는 미륵불상. 미륵불은 산골이나 들판 혹은 논밭의 둑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돌로 깎아 만든 부처님이 아닌 자연석마저도 우뚝 솟아 있거나 잘 생긴 것을 미륵이라 하고 신앙행위를 했다. 이 미륵신앙은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확산되었고,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신앙으로 뿌리내려왔다.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정평리 74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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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에 전해 내려오는 교훈담. 이 설화는 다른 문헌이나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설화로서 진주시 홈페이지 집현면 네트워크 ‘내고장 유래’ 속에 제보자 미상의 작품으로 채록, 게재되어 있다. 전국적으로 아내가 실천한 열행은 산재하여 있으나 제대로 전파, 전승되는 곳은 흔하지 않다. 그러나 그 내용은 대체로 집현면의 안씨 부인의 경우와 같이 남편을 위하여 손가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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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어머니가 병이 들자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였다. 병든 어머니의 몸을 씻기고, 어머니의 쾌유를 위해 정성을 다해 하늘에 빌었다. 끝내 어머니가 돌아가자 크게 애통해 하였고, 예를 다해 장사를 지냈으며, 여묘에서 미음을 먹는 등 정성을 다했다. 진주 설매리(雪梅里)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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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천사국(千思國)이고, 아버지는 전성덕(全成德)이다. 현모양처의 기품이 남달라 시부모와 남편을 잘 공경하고 모셨다. 시아버지의 성격이 엄하였으나 이를 잘 받들어 효성으로 모셨고, 병이 들어 위독한 지경에 처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성껏 간호했다. 시어머니 상을 당하였을 때는 매우 애통해 했다. 이와 같은 경산전씨의 열행은 마을에 알려져 주위 사람들이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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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부. 남편은 천사택(千思澤)이고, 아버지는 박헌형(朴憲衡)이다. 진주 설매에 살았다. 시집가기 전부터 현모양처의 기품이 배어있었는데, 19세 되던 때에 천사택(千思澤)에게 시집가서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고 남편에게 순종하였다. 시어머니가 병이 들어 수개월간 회복하지 못하자 산과 하늘에 시어머니의 쾌차를 비는 제사를 올리는 등 극진히 간호하였다. 그러나, 결국 시어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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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한씨(韓氏)는 기자조선에 연원을 두고 있다. 위만에게 밀려 마한으로 온 준왕(準王)[기자(箕子)의 40대 후손]의 8세손인 원왕(元王)은 3형제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인 우량(友諒)이 신라의 상당(上黨)[청주의 옛 지명]으로 옮겨 한씨라 칭하였다고 전한다. 사적에 의하면 한씨의 시조는 기자의 후예 우량의 32세손 한란(韓蘭)[?~?]이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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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내동면 독산리에 있는 청주한씨 판서공파의 고문서들. 교지 2점과 효행정려소지 9점 등 모두 11점이다. 교지 2점은 각기 조선 인조 16년(1638)에 작성 제수된 한성원(韓聖源)의 정이품 당상관(堂上官) 교지와 조선 효종 8년(1657)에 작성 제수된 한치범(韓致範)의 종이품 당상관 교지이다. 제작 시기는 오래되었지만 보관 상태는 양호하다. 효행정려소지 9점은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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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수면 청원리에 건축했던 사당. 이 사당의 소재지는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이며, 조선시대에 건축되었던 사당이었으며, 고종시에 철폐되어 현재 복건사업이 진행 중이고, 비석이 남아있다. 성종시의 명신인 홍문관 부제학 이관재와 그 후손인 행와 행정을 배향하여 제사지내던 사당으로 조선시대에 건축되었다. 그 후 고종시에 이 사당이 철폐되었는데, 후손인 이기환이 이 사실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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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내의 촉석루에 걸린 현판의 시. 현재 촉석루에는 현판에 새겨진 9편의 시가 걸려 있다. 하륜이 지은 「촉석루기」에는 훌륭한 시영(詩詠)으로 면재 정을보, 우곡 정이오, 상헌 안진[?~1360], 경은 설장수[1341~1399], 급암 민사평[1295~1359], 이재 허선생(누구인지 불명) 등 여섯 명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정을보와 정이오의 시가 촉석루에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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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일이 촉석루의 공사과정을 표현한 글. 진양하씨인 하수일(河受一)이 1583년에 진주성 내의 촉석루 중수 공사과정을 설명한 글이다. 하수일[1553~1612]은 남명 조식의 뛰어난 제자였던 각재 하항의 종질(從姪)이면서 그의 문인(門人)이기도 하다. 그는 촉석루가 중수되자 이를 기려서 기문을 짓게 되었다. 촉석루가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과 여러 차례 헐리고 다시 세워진 사실을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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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집안의 시어머니와 맏며느리의 상이 함께 있자 시아버지의 명령대로 살림을 맡고 모든 조카들을 자식처럼 길렀다. 그러다가 남편 최상린(崔祥鱗)이 세상을 떠나자 마음속으로 따라 죽을 것을 맹세하면서도, 밖으로는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이 진양하씨의 범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 채고 항상 살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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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정씨는 남편 최태재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 식구에게 말하기를 “여자가 순종해야 할 세 가지 길이 있는데, 나는 자식이 없으니 남편을 따라서 죽는 것이 옳다. 내가 죽거든 남편과 같이 장사지내 달라.” 하고 목을 매어 죽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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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사비(私婢)로, 사노(私奴)인 개동(介同)의 부인이다. 남편이 죽은 뒤에 다른 사람이 정조를 뺏으려 하였으나, 굳게 지켰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는 사죽리(沙竹里)에 살았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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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에 있었던 사우.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에 맞서 싸운 진주성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의 신위를 모시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김시민의 신위는 창렬사(彰烈祠)주벽에 옮겨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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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尹莘達)은 태조 왕건을 도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 개국공신으로서 태자를 교육시키는 태사삼중대광에 봉해졌다. 그의 5세손인 윤관(尹瓘)[1040~1111] 장군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1107년(예종 3)에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한 뒤 여진정벌에 나서 적 5천 명을 죽이고 13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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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전해오는 하경복(河敬復)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의 어머니 보성선씨는 어느 날 밤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자신의 아들이 반찬거리로 잡혀있으니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부인은 집에 잡아놓은 자라 한 마리가 노인의 아들이라고 여겨 곱게 옷을 입힌 다음 동강에 방생했다. 그리고 돌아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백발노인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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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의원(儀元). 원정공(元正公) 하즙(河楫)의 후손이다. 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는데, 항시 시탕(侍湯)에 곁을 떠나지 아니했으며, 부모가 위독할 지경에 처했을 때는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하여 목숨을 아홉 달이나 연장시켰다. 사후에는 시묘(侍墓)를 삼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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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유중(孺仲), 호는 고재(顧齋). 함와(涵窩) 하이태(河以泰)의 둘째 아들이다. 일찍부터 집안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평상시에도 옷을 끄르고 있거나 책상다리를 하고 편히 있지 않았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성리의 학문에 종사하더니 우산(愚山)에서 글을 읽으면서 역병에 걸렸다. 정종로가 날마다 두 번씩 병을 묻고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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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대천리에 있는 하경휘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하경휘의 호는 매헌이며 환성재(喚醒齋) 하락(河洛)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따라 상주(尙州)에 갔다가 왜병의 칼에 죽게 되자 아버지를 안고 적의 칼을 맞아 같이 죽었다. 일설에 의하면, 적이 먼저 아버지를 치려 하자 하경휘가 양팔을 벌려 아버지를 막고 칼을 막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아버지는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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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추약(追若), 호는 옥봉(玉峯). 송강(松岡) 하항(河恒)의 후손이다. 부인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보이는 박인호(朴寅浩)의 딸 밀양박씨이다. 평생 독서하기를 즐겼다. 면우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과 우애가 돈독하여 함께 만수당(晩修堂)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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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진양인 하계락(河啓洛)이고, 아버지는 사인 박인호(朴仁浩)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밀양박씨는 천성이 순하고 효성스러워 시부모를 잘 모시고 남편을 공경하는 등 예의규범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특히 계시모를 섬기는 데에 정성을 다하니 향리에서 모두 그 효행에 감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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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낙경(洛卿), 호는 만취(晩翠). 송판(松坂) 하완(河浣)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따르면 하계범(河啓範)은 품성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총명하면서 기록하는 데 힘써 문예가 남보다 뛰어났다. 그러면서도 벼슬을 구할 뜻이 없고 항상 굳은 절개로써 스스로를 가다듬고자 애써 만취(晩翠)로써 호를 삼았다. 같이 즐기며 학문을 닦고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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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하계석(河啓錫)이고, 아버지는 이호주(李浩柱)이다. 합천이씨는 남편이 일찍이 습진에 걸려 고생하였는데 효험 있는 약이 없었다. 어느 날 미꾸라지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 시험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 날마다 대소쿠리를 가지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미꾸라지를 잡으러 다녔다. 추운 겨울철에도 미꾸라지를 잡아 시탕해 올렸으나 남편은 차도가 없었다. 하늘에 치성을 드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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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희량(希亮). 진주 신당리에 살았다. 천성이 양순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행실이 돈독하여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하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다고 한다. 일찍부터 글재주로 이름이 있었고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은 하지 못하여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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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해주정씨는 성품이 단정하고 규범이 있었는데, 남편 하규원(河珪源)이 세상을 떠나자 매우 애통해하였다. 예를 다하여 남편의 장례를 치렀고, 시부모를 더욱 정성껏 모셨으며 집안 살림에도 정성을 쏟았다. 또한 “재물이 없으면 지아비의 제사를 받들 수가 없을 것이다.” 라고 하고 첫 기일을 맞아 남편의 묘를 찾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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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청언(淸彦)이고, 호는 국헌(菊軒)이다. 학식이 매우 넓고 뛰어나며 정의감이 투철하고 절개가 곧았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고, 또한 집안을 다스릴 때 항상 바른 가르침으로 다스리려고 노력하였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도량(度量)이 넓고 컸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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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백원(伯源). 죽헌(竹軒) 하성(河惺)의 아들이며, 영모정(永慕亭) 하진보(河晋寶)의 손자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였다고 한다.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발랐으며 학업이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약관(弱冠, 스무 살)에 동계(東溪) 권도(權濤)의 신주(神主)를 썼는데 원근의 사림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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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진숙(晉叔), 호는 한계(寒溪). 설창(雪窓) 하철(河澈)의 손자이다.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다른 사람에 비해 뛰어나고 문장과 필법으로 당시 선비들 가운데 이름이 났다. 약관(弱冠, 스무 살)의 나이에 향교의 교육과정을 마쳤고, 성리학에 깊이 통달했으며, 또 예학(禮學)을 밝게 익혀서 원근의 선비들이 찾아와서 물을 정도였다. 『진양속지(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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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신여(愼汝), 호는 사와(士窩). 함와(涵窩) 하이태(河以泰)의 다섯째 아들이다. 부친의 성품이 엄준하여 어릴 때부터 범절이 몸에 배어서 덕기가 어른 못지않았으며 차차 자라가면서 힘써 문사를 배워서 다듬었고 주자학 공부에 전념하여 주자서 읽기를 자신의 말을 외우는 것과 같이 하였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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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녀·열녀.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하득곤(河得鯤)의 딸 하씨의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어려서 아버지가 병이 들어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를 하였으나 상태가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정려(旌閭)되지는 않았다. 진주 운곡(雲谷)에 살았다. 진주는 예향(禮鄕)으로써 많은 지조있는 선비들을 배출했는데 그에 못지않게 효자와 효녀도 많이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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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길보(吉甫), 호는 단사(丹砂). 치와(癡窩) 하응명(河應命)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그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슬기로우며 문장이 뛰어나 여러 번 향시에서 합격하였으나 부모상을 당하여 본래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써 그 문하에서 학문을 이룬 사람이 많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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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주강씨는 성품이 효성스러워 시부모를 정성껏 모셨다. 남편상을 당하자 염습과 제수 마련을 손수하여 소홀함이 없게 하고 예로서 장례를 지냈다. 남편 사후에도 시부모 섬기기를 평소와 같이 하다가 어느 정도 집안일이 안정된 후 자진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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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여민(汝敏). 영무성(寧無成) 하응도(河應圖)의 손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일찍부터 학문으로 이름이 있었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벼슬길에 뜻을 끊고 후진을 가르치고 일깨우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다고 한다. 후에 경상남도 산청에 있는 덕천서원(德川書院)과 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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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부. 본관은 진주(晋州). 사인(士人) 하약(河瀹)의 부인이다. 일찍 남편을 잃고 평생토록 머리에 기름을 바르지 않았다. 집안이 가난하여 품팔이를 하였으나 제사에는 음식을 풍성히 하였다.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다가,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풍성히 하였다. 또한 염습과 의복을 모두 스스로 지었다. 진주 신당리(新塘里)에 살았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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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따르면 하옥동은 향리(鄕吏)로, 성품이 본래 정성스럽고 부모를 정성을 다해 모시는 등 효성이 남달랐다. 부모가 돌아간 뒤에는 기름진 음식을 피하고 결국 생을 마쳤다고 한다. 진주 주내(州內)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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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하용도(河用渡)이고, 아버지는 최영순(崔永淳)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전주최씨는 심성이 효성스러워 시부모를 정성껏 모셨다. 남편이 중한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자, 최씨는 살아서 의지할 데가 없음을 애통히 여겨 바로 남편 뒤를 따라 하직하려 했으나, 스스로 이르기를 “자식이 없는 상인데 내가 어찌 예를 다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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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밀양박씨는 효성이 지극하여 7, 8세의 어린 나이에도 홀로된 어머니를 잘 모셨다. 17세 되던 해 결혼을 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남편이 요절했다. 남편의 장례 후, 한결같은 예로써 3년 상을 행하였다. 시부모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밀양박씨를 가엾게 여겨 다시 시집보낼 생각을 하니, 이를 눈치 챈 밀양박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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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강중(康仲), 호는 예암(豫菴). 석계(石溪) 하세희(河世熙)의 현손이다. 나이 31살에 죽었으나 당시에 작은 안자(顔子)라고 칭할 정도로 학덕이 높았다. 후산(后山) 허유(許愈)가 그 묘에 표(表)하여 이르기를 ‘천자(天資)가 수미(粹美, 순수하게 아름답다)하여 등이(等夷)에서 훨씬 뛰어났고 여기에 조예가 정심한 것을 더했으며 행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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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 세운 운수당(雲水堂) 하윤(河潤)의 묘비. 운수당 하윤은 평안도 순천군수로 재직하던 중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향인 진주 금곡면 검암리 운문 선영에 묻힌 후 그의 공을 기려 묘비를 세웠다.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 운문 행우산 기슭의 묘역에 세워져 있다. 이수, 비신, 귀부가 하나의 돌로 된 일체형 비로 전체 높이는 260㎝이다. 비의 재질은 분석이며, 비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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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군직(君直), 호는 오오당(五吾堂). 괘곤정(掛壼亭) 하정(河瀞)의 아들이다. 두 번이나 향시에 합격했으나 최종적으로 예조에서 통과되지 못하였다. 이후 평생을 궁한 대로 살면서 검약을 지키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자경훈몽(自警訓蒙)』과 『궁격설역리(窮格說易理)』 등의 유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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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성휴(聖休), 호는 치와(癡窩)이다. 타고난 자질이 영리하고 재치가 기발하였다. 효행과 우애가 돈독하였고 가학을 잘 이어받아 향시에 여러 번 합격하였다. 그러나 조용히 학문을 갈고 닦으면서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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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여칙(汝則), 호는 자송당(自訟堂). 송파(松波) 하원(河沅)의 손자이다. 세 번이나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문과시험에 응했지만, 서리가 좋은 물건을 요구하는 것을 보고는 과거를 포기하고 성리학 공부에 매진했다.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과 내수(耐叟) 허추(許錘)와 더불어 도의의 교분을 가졌는데, 진주목사 윤노동(尹魯東) 영(營)에 보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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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사언(師彦). 함와(涵窩) 하이태(河以泰)의 아들이다. 글 읽는 것을 상례(喪禮)에서 익혀 어릴 적부터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아버지 명을 받아 밖에 나갔다 오다가 밤이 되어 문이 닫혀 있으면, 어버이가 잠에서 놀라 깰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부르지 않고, 또 돌아와서 얼굴을 대하지 않는 것도 염려스러운데다 자기 방에서 편안히 지내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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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응백(應伯), 호는 어은(漁隱)·초은(樵隱). 하맹산(河孟山)의 현손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고 영특하였으며 지조가 높았다. 또한 효심이 지극하여 『소학』의 「내칙(內則)」에 뜻을 두어 힘써 익히다가 닭이 울면 어버이 침소를 돌아보고 보살펴 드렸다. 후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를 할 때는 까마귀 한 쌍이 날아와 여막에서 지새니,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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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오겸(五兼), 호는 함와(涵窩). 성품이 강직하고 중후하여 집에 있으면서도 몸을 단정히 하며 한결 같이 『소학(小學)』 「내칙(內則)」으로 모범을 삼았다. 밤이 깊어서야 여러 아들과 며느리, 손자와 증손자들이 차례대로 들어와 인사를 올리게 하고 닭이 울면 세수하고 빗질하고 또 들어와서 살펴보게 하였다. 이처럼 80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고, 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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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경가(敬可). 쌍강(雙岡) 하홍운(河洪運)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와 형을 따라 공부하였으나 가난이 심하여 봉양할 수가 없음을 알고 가산을 잘 다스려서 집안을 일으켰다. 형이 병에 걸려 여러 해 고생하다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나 부인을 잃었을 때도 한 번도 수심스럽거나 괴로운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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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이해(爾海), 호는 괘호정(掛壺亭). 생원 하달제(河達濟)의 아들이다. 세 번이나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자리를 구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학문을 강하니 후진들이 많이 와서 배웠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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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정경(鼎卿), 호는 한시당(恨是堂)이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있어 경사(經史)에 박통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가볍지 않고 강직하여 남에게 아첨하지 않았고,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구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흠앙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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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字)는 탁지(卓之), 호는 겸와(謙窩). 모송재(慕松齋) 하인상(河仁尙)의 후손이다. 젊어서부터 뛰어난 자질을 바탕으로 하여 뜻을 돈독하게 하고 힘써 배웠다.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어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받드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여러 번 향시에 장원을 하였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활동하였다. 동시대의 선비들이 모두 따랐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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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성품이 온순하고 효성스러워 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아버지가 병이 들자 목욕재계하고 아버지의 쾌차를 하늘에 빌었으나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자 크게 애통해 하고, 예를 다해 장사를 지내니 주위 사람들이 크게 칭찬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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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내윤(乃潤), 호는 사연(舍淵). 하자호(河自灝)의 현손이다. 집이 가난하여 몸소 밭을 갈고 글을 읽었다. 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극히 하였다. 만년에는 방장산(方丈山) 가운데에 살면서 학문에 진력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선비의 본분인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몸소 실천한 진주의 대표적인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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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사흘(士屹)이고 호는 사고헌(四顧軒)이다. 습정재(習靜齋) 하응운(河應運)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따르면 성품이 강직하여 선행(善行)에 앞장섰다고 한다. 일찍이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과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일찍이 이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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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이호(而浩), 호는 제암(霽巖). 성종 때의 문신 운수당(雲水堂) 하윤(河潤)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워 우애가 있었으며 자신의 처자만 편애하지 않고 오직 부모를 봉양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부모가 그를 분가시키고자 하니 울면서 거절하고 형제가 함께 살며 부모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상중에 있을 때에는 그 슬픔이 지극하여 향리에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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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여해(汝海). 진사 하협(河悏)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깨우쳤고, 성품과 행실이 효성스러웠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서 몸을 다하여 공경하였고,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서는 3년의 시묘를 정성을 다하여 예로써 마쳤다. 후일 마을 사람들이 그 산소가 있는 골짜기를 ‘하효자 시묘골’이라고 이름 붙여 그의 효행을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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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벼슬이 사직(司直)에 이르렀는데, 90세가 된 아버지가 중한 병이 들자 대변을 맛보고, 종기를 입으로 빠는 등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였다. 아버지의 사후에는 6년 동안 상을 하였다. 『진양지』권3「인물조」에 이름이 올라 있다. 또한 하현부의 기사는 『동국여지승람』「진주목」효자조와 대동운부군옥에도 보이는데 진양하씨로서 효행이 지극한 선비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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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공(丹池公) 하협(河悏)[1583~1625]과 그 자손들의 유묵과 유적 일괄. 조선시대 진주에는 남명학(南溟學)이 크게 발전하였는데 단목(丹牧)의 진양하씨(晋陽河氏) 또한 학문적으로 남명학파에 속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인 가문이었다. 단지공 하협은 진사로 급제하였으나 출사를 하지 않고 평생 학문에 정진했으며, 그 후손인 하진보(河晋寶), 하위보(河魏寶), 하윤관(河潤寬), 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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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성오(省吾). 영무성(寧無成) 하응도(河應圖)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따르면 일찍부터 가풍을 이어 받아,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옛 성현의 글을 마음에 두고 깊이 새겨 당시의 선비들이 군자다운 사람이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감사 우복룡(禹伏龍)은 효우(孝友)스럽고 독실한 선비라고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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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남편 한진권이 병이 들어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하늘에 빌고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게 하는 등 정성을 다해 간병하였으나 남편이 결국 죽고 말았다. 예로서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남편의 영정을 거두고 난 후에는 즉시 방으로 들어가 약을 마시고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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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강씨는 남편 한진영이 병이 들어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였으나 남편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얼마 후 진양강씨가 딸을 낳았으나 성장하지 못하고 생을 마치니, 진양강씨는 남편의 묘로 가서 이를 아뢰고, 곧 돌을 안고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남편 한진영은 한진권의 쌍둥이 아우였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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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조선시대 석탑.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구양리에서 발견되어 탑 옆에 세워놓은 설명판에 '함양구양리 삼층석탑(咸陽九楊里 三層石塔)'으로 표기되어 있다.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진주성 내 국립진주박물관 앞에 위치하고 있어서 박물관 앞 석탑으로도 불리고 있다.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구양리의 옛 절터에서 발견된 것이라 전할 뿐 유적에 대한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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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해주정씨(海州鄭氏)는 고려 신종[1197~1204]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법정랑(典法正郞) 시중평장사(侍中平章事)의 관직을 지낸 정숙(鄭肅)을 시조로 하고 있다. 선계(先系)는 문헌이 전해오지 않아 상고할 수가 없으나, 해주(海州) 수양산(首陽山) 아래에서 세거했던 사족(士族)으로 고려 때에 정씨로 사성(賜姓) 받았다고 전한다. 시조 이후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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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김해. 자는 군무(君茂). 성품이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워 16세 때 어머니 병환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써 3년을 더 연명시켰다. 그리고는 손을 항상 감추고 다니면서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니 아버지가 타이르면서 몸조심을 당부할 정도였다. 후에 아버지상을 당하여서도 상복의 띠를 풀지 않고 3년을 시묘하였으나 불행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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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담리에 있는 허소유의 정려. 허소유(許小(由+己))는 고려 공민왕 14년(1363) 사헌부장령을 지낸 관리였다. 본명은 계도(繼道)이다. 1384년(우왕 10) 모친상을 당하여 애통한 예를 지극한 마음으로 다하면서, 당시 침입한 왜구도 겁내지 않고 평소처럼 집례하는 것을 보고 그 효심에 감동하여 주위 수십 리에 침범을 금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허소유의 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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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김해인 허정(許禎)이고, 아버지는 사인 하경춘(河慶春)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17세 되던 해에 시집가서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는데, 남편이 중한 병에 걸리자, 유명한 의원을 찾아다니고 아침저녁으로 남편 간호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남편이 위독한 지경에 처하자 자신의 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여 간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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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통식화포(有筒式火砲). 유통식 화포는 그 크기와 사용되는 화약의 양, 발사거리에 따라 4가지로 분류하여 천자문에서 그 이름을 따서 천·지·현·황자총통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현자총통은 유통식 대형화기 중 세 번째로서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다음 단계의 유통식 중화기로 지자총통과 형태상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현자총통(보물 제1233호)은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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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전주이씨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착했는데, 17세가 되던 해 남편 홍경섭이 병으로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다. 혼자 남은 전주이씨는 아들을 따라 죽으려는 시어머니를 말리면서 “지어미가 지아비를 따라 죽는 것은 의로운 일이지만, 어찌 어머니가 아들을 따라서 죽는 이치가 있겠습니까.”하고 슬픔에 잠긴 시어머니를 위로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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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나주임씨는 남편 홍차수가 중한 병에 걸려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고, 남편의 쾌차를 하늘에 비는 등 정성을 다하였으나 마침내 죽고 말았다. 남편의 뒤를 따라 갈 것을 결심한 나주임씨는 이 일을 시어머니께 고하고 세 명의 동서에게 자신의 두 아들을 부탁한 다음, 밝은 새벽에 침실에 들어가서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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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운선(雲善). 통정대부 황계량(黃桂亮)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러워 삯일을 하여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어느 해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3년간을 자리에 눕게 되자 지성을 다하여 약을 달이고 하늘과 산신에 빌었다. 그가 약을 구해 밤중에 산길을 오는데, 그의 효심에 호랑이도 감동하였는지 그를 지켜주었으며, 의원집에 가도 사나운 개가 꼬리를 치며 반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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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장흥리에 전해져 내려오는 보응담. 특정 인물의 효행에 얽힌 설화는 설화집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와 유사한 내용은 『한국구비문학대계』, 『진양효열지』 등에 나타나고 있다. 황기원의 효행에 대한 기록은 진주시 홈페이지 집현면 네트워크에 ‘내고장 유래’라는 항목에 ‘효자 황기원과 호랑이’란 제목으로 게재되어 있다. 옛날에 집현면 장흥에 황기원(黃基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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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도자기 가마터. 효자리 가마터는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에 위치한 조선시대에 도자기를 굽던 가마터로서 15~16세기 무렵 지방의 도자기 수급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85년 경주박물관의 지표조사에 의하여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에서 가마터의 흔적과 각종 도편이 쌓여진 퇴적층이 재확인되었다.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하동...